고난주간 묵상, 마 22:21,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누구의 형상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던 그 마지막 일주일, 고난주간 중 화요일은 특히 많은 논쟁과 대면의 순간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진리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함정을 파기 위한 교활한 술수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짧은 한마디는 그들의 속셈을 꿰뚫으신 지혜의 응답이자, 우리의 마음을 향한 거룩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노렸는가
그날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함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조합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동맹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족주의자였고, 로마의 통치를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반면 헤롯 당원들은 로마와의 협력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이 공모하여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이 질문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금을 찬성하면 유대 민중의 반감을 살 것이고, 반대하면 로마에 반역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거짓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거짓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여기서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ὑποκριτής hypokritēs'이며, 원래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를 뜻합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가면을 쓴 조종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전을 가져오게 하시고 묻습니다.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대답은 단지 지혜로운 말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인간의 주권, 정치와 신앙,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교활함을 무력화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 모두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누구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형상에 대한 질문
로마의 동전에는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제의 이름과 신성을 칭송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신적 존재로 숭배되었기 때문에, 그 동전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신학적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전을 보며, 세속 권력의 소유권을 인정하시면서도 동시에 더 깊은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은 세상 나라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필요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단지 세금에 대한 입장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어진 말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선언은, 인간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면,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히브리어 'צֶלֶם tselem'은 본질적인 유사성, 대표성을 의미합니다. 동전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졌다면, 우리 존재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형상의 본질을 잊고 살아갑니까? 신앙은 고백하면서도, 삶의 방향은 철저히 세속적 계산과 이득 중심으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의 형상보다 가이사의 구조에 순응하려는 태도가 너무도 뚜렷합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복음을 왜곡하고, 숫자와 규모를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시할 때, 우리는 이미 다른 형상 앞에 무릎 꿇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것, 그리고 나
고난주간에 예수님은 권력과의 대결 한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셨고,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을 꾸짖으셨으며,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진짜 소속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시간, 재능, 물질, 생명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것들을 내 것이라 주장하고, 가이사의 질서에 묻어가며 살아갑니다. 예배조차도 소비하며, 신앙조차도 평가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너는 누구의 것이냐?" 그리고 더 나아가, "네 삶은 누구에게 바쳐지고 있느냐?" 우리가 교활하게 둘 사이에서 타협하려 할 때, 예수님은 경계를 명확히 하십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 구분은 세속과 성속을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세금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안에 있지만, 인간의 영혼과 존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줄 것을 주되,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직접 그 답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 되돌리기 위하여, 그분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헌신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습니다.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결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고난주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선언입니다. 그 당시 교활한 자들의 무지를 꿰뚫으신 예수님의 지혜는 오늘도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누구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고난주간,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이 질문을 다시금 되새깁시다. 내 시간은 누구의 것인가? 내 자녀, 내 직장, 내 열정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내 생명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질문 앞에 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나를 다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교활한 세상의 질문 속에서도, 진리의 빛으로 대답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참된 예배자, 참된 제자, 참된 형상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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