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막 11:15 성전에서 쫓겨나야 할 것들
쫓겨나야 할 것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 거룩한 공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기도하는 자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어느 날, 예수님은 그 집에서 분노하셨습니다. 상을 엎고, 사람들을 내쫓고, 소리를 치셨습니다. 막 11:15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이 말씀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묵직하게 되묻는 장면입니다.
성전, 그리고 상인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특히 유월절 기간에는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모여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 제물, 성전세를 낼 수 있는 환전, 그리고 제의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뜰, 특히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장사하는 자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움"은 곧 타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신앙을 도와야 할 도구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예배를 위한 준비가 장사로 대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더 이상 용납하실 수 없었습니다. 헬라어로 '매매하다'는 단어는 'πωλέω pōleō'인데, 이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 이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이제 거룩을 거래하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에 들어오셔서 행동하십니다. '들어가사'라는 말은 헬라어 'εἰσέρχομαι eiserchomai'로, 단순히 어떤 장소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따라 성전으로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내쫓다'는 단어는 'ἐκβάλλω ekballō'인데, 이는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힌 장사꾼들을 악한 세력으로 간주하시고 단호히 몰아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배당 안에서 물건을 팔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장사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며, 권력과 손잡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성전을 장사터로 만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통계와 마케팅 전략에 의존하고, 목회가 성령의 인도보다 여론과 기획에 끌려 다닐 때, 우리는 주님이 상을 엎으셔야 할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타협의 유혹
왜 성전이 상업화되었을까요?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의는 곧 습관이 되고, 습관은 체계가 되며, 체계는 이익을 만들고, 이익은 곧 권력이 됩니다. 그 결과,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권이 얽힌 구조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전 안에서 이루어진 장사는 단지 경제 행위만이 아니라, 권력과의 결탁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은 서로의 이익을 보장하는 체계를 만들어냈고, 성전세와 제물 장사는 특정 계층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대형 교회들이 정치와 손잡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혀가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유지와 확대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손을 잡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예언자적 선포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장의 이 사건은 단순히 성전의 정결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의 종교 권력과 대립하셨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분은 고요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상을 엎고, 쫓아내고, 뒤집으셨습니다. 그분의 열심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가 쫓아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분노를 일으키는 상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당 안에는 더 이상 환전상이 없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는 여전히 교환과 거래의 욕망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산하며, 기도의 시간을 결과로 환산하며, 섬김과 헌신조차도 보상을 기대합니다. 이런 신앙은 여전히 장사꾼의 마음입니다.
성전은 헌신의 장소입니다. 계산이 아닌 헌신이 흐르고, 거래가 아닌 사랑이 넘쳐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장사꾼을 몰아내셨을 뿐 아니라, 어린이들이 찬양하게 하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상이 무너진 그 자리에는 다시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건 이후 성전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이 나아와 고침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상이 엎어진 자리에 치유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은 상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상을 무너뜨릴 때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전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그는 상을 뒤엎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 상을 붙들고 앉아 있지는 않은지요.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주님의 음성보다 그 상이 부서질 때 나는 소리를 더 두려워합니다. 평안을 빙자하여 불편한 진리를 외면하고, 질서를 핑계 삼아 위선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질서와 평안을 깨뜨리시며, 거룩한 불편함을 통해 진짜 예배로 이끄십니다.
결론
막 11:15은 고난주간의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호하고 뜨겁게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고, 그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다시 예배를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다시 질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팔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있으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상을 보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것이 내가 피로 산 교회의 자리인가?"
고난주간, 우리는 주님의 열심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안의 상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주님, 다시 예배가 회복되게 하소서. 진짜 예배, 진짜 교회, 진짜 성도가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소망은 상을 붙들 때가 아니라,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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