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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마 23:27 회칠한 무덤

bibletopics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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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칠한 무덤, 껍데기의 신앙을 벗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드러내신 말씀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도 고통스러운 경고는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책망이었습니다. 그 책망의 핵심이 바로 마태복음 23장입니다. 그중 27절은 비유와 상징이 절묘하게 맞물린 강렬한 선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고난주간,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게조차 끝까지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음성 앞에서 어떤 옷을 입고 서 있어야 할까요?

회칠한 겉모습, 썩어 있는 속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 관습에서는 유월절을 앞두고 무덤을 흰 석회로 칠해 눈에 띄게 했습니다. 이는 제사 기간 중 실수로 무덤에 접촉하여 부정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겉으로 보면 깨끗하고 흰빛을 띠었지만, 그 속은 썩은 뼈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회칠된 무덤을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적 신앙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외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ὑποκριτής hypokritēs'입니다. 이는 원래 배우가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이들의 신앙이 진실된 것이 아니라, 연기와 같은 가면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경건한 척, 율법을 지키는 척,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지만, 그 안에는 진실한 믿음이 없고, 오히려 부패와 거짓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이유는 단지 분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진리 앞에서 외면하는 자들에게, 회개의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마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울부짖듯,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외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지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이자 권면입니다.

껍데기의 신앙이 만연할 때

오늘날 교회는 겉으로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정돈된 예배당, 세련된 프로그램, 감동적인 찬양과 능숙한 설교까지. 그러나 그 겉모습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 이는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주일에는 경건하지만, 월요일부터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요.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도 삶이 바뀌지 않고, 기도를 드려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이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는 형태를 지키는 데는 유용하지만, 생명을 품지 못합니다. 회칠한 무덤이 멀리서 보면 멀쩡해 보이듯이, 종교의 형식은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은 말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는, 중심의 생명력으로 판별되는 것입니다.

껍데기의 신앙은 반복되는 습관 속에 숨어 있습니다. 새벽 기도도, 봉사도, 헌금도 오래 하다 보면 몸에 배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덤처럼 비어 있는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는 자신의 경건을 자신도 믿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착각입니다.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며,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경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 책망 너머의 사랑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예수님의 책망은 단순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꾸짖듯, 스승이 제자를 다그치듯, 예수님은 그들 안에 아직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향해 화를 외치시면서도,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울고 계셨습니다.

고난주간의 예수님은 분노와 눈물 사이를 걷고 계십니다. 거룩한 분노로 성전을 정화하시고, 깊은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그리고 가식과 거짓에 물든 종교를 향해 진리를 선포하시면서, 자신의 몸은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이토록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감정들이 한 분 안에 공존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책망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믿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자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무너질 때, 비로소 부활의 생명이 시작됩니다. 무너짐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결론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날카로운 칼처럼 다가옵니다. 겉은 번듯하지만, 속이 썩어 있는 종교적 위선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초대입니다. 껍데기의 신앙을 벗고, 진짜 중심을 회복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외식의 옷을 벗고, 눈물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신앙이 회칠한 무덤이 되지 않게 하소서. 겉모습보다 중심을 살피는 믿음을 주시고, 습관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눈물 앞에, 나도 무릎 꿇게 하시고, 회개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소서.

죽은 믿음은 회칠한 무덤으로 끝나지만, 살아 있는 회개는 부활의 문을 엽니다. 그 문을 향해, 오늘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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