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마 21:13, 만민이 기도하는 집
다시 기도의 집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절기를 맞이한 순례자들이 성전을 오르며 제사를 준비하고, 장사꾼들의 외침이 메아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날, 성전 안의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얼굴로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시며 외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마 21:13) 고난주간, 그분의 분노에 담긴 거룩한 열심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전은 누구의 것인가
예수님은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곧장 성전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분의 첫 행보가 성전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며,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은 이제 장사와 교환, 이익과 거래의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선언은 이사야 56장 7절과 예레미야 7장 11절을 연결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고, 예레미야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말씀을 하나로 연결하며, 지금의 성전 상태를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현실은 단순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왜곡을 보여주는 현상이었습니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תְּפִלָּה tefillah'이며, 이는 단순한 요청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성전은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자리를 돈과 거래로 더럽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성전 건물 안의 불의를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자리를 사람의 이익으로 가득 채운, 신앙의 왜곡을 바로잡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망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교회는 과연 지금도 기도의 집입니까?
뒤엎으시는 그리스도
마태복음 21장 12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행위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예언자적 행동이자 심판의 선포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전통을 따르시면서도, 단순한 예언자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의 권위를 회복하시는 주권자로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행동은 요한복음에서는 공생애 초기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고난주간에 등장합니다. 학자들은 이 사건이 두 번 있었는지, 혹은 하나의 사건을 복음서 기자들이 각각 다르게 배치했는지 논쟁하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열심, 즉 'ζῆλος zēlos'는 하나님의 집을 향한 거룩한 질투였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상과 의자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임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전히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내면에 있는 이익과 계산, 위선과 외식을 뒤엎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저항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이 너무 오래되어서 이제는 나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뒤엎어짐이 고통스럽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고, 기도에 응답이 없고, 관계가 깨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이러십니까?" 그러나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 안의 성전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분노는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열심입니다.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다시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주간, 그분이 성전을 향해 하신 첫 행동은 제사도, 찬송도 아니었습니다. 기도의 회복이었습니다. 기도는 신앙의 호흡이자, 관계의 열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기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효율을 위한다는 이유로, 기도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갑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일컬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κληθήσεται klēthēsetai'이며, 이는 단순히 명칭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하고, 성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기도는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나를 순복시키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그 기도는 고통을 없애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나를 포기하는 연습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우리의 자아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참된 성전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기도는 예배의 심장이고, 교회의 중심이며, 성도의 생명선입니다. 고난주간, 이 기도의 자리에 우리가 다시 서야 합니다.
결론
고난주간,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우리 안에 유효합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며, 기도는 형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삶의 상을 뒤엎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고난주간, 우리의 성전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뒤엎으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기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분노는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며, 정결케 하심은 거룩한 손길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주님께서 찾으시는 기도의 집으로, 다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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