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요 2:16, 아버지의 집인가, 장사하는 집인가
아버지의 집인가, 장사하는 집인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외치셨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요 2:16) 이 짧은 외침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거룩과 속됨, 경배와 거래, 기도와 계산이 맞부딪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오늘 교회의 본질을 다시 물어야 합니다. 고난주간, 성전을 향한 주님의 거룩한 열심을 우리의 심령에도 불붙이기를 원합니다.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요한복음 2장의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났습니다. 성전 뜰 안에는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과 돈 바꾸는 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제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방에서 올라왔고, 제물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수단으로 장사가 자리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용이 곧 신앙의 중심을 점령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사하는 집"이란 표현에서 '장사하다'는 헬라어로 'ἐμπορεύομαι emporeuomai'로, 단순히 무언가를 사고파는 것 이상으로, 이윤을 추구하고 이득을 계산하는 사고방식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계산의 공간으로 전락한 현실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발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상징적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예수님은 몸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진흙으로 예루살렘을 묘사했던 것처럼, 호세아가 창녀와 결혼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상을 뒤엎음으로 성전의 본질을 다시 드러내셨습니다.
이 사건은 고난주간에 기록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성전 정화 사건과는 시기적으로 다르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열심, 곧 'ζῆλος zēlos'는 아버지 집을 위한 거룩한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의 탐욕이 자리 잡았을 때, 그분은 참을 수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집, 그 의미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과 사역의 방향을 명확히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장소입니다. '아버지의 집'이라는 표현은 누가복음 2장에서 어린 예수님이 성전에 머무르시며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거룩한 공간입니다. 거룩이란 단어, 히브리어 'קָדוֹשׁ qadosh'는 구별됨, 다름,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성전은 세상과 다른 공간이어야 했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자리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집으로 변질된 성전은 더 이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건물로서의 교회는 웅장하고 세련되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장사하는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행사와 프로그램, 재정과 기획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경외는 뒤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성도가 모이는 자리가 ‘시장’이 되고, 설교는 ‘콘텐츠’가 되며, 목회는 ‘관리’로 전락할 때,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들어야 합ㅋ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거룩함과 거래 사이
아버지의 집과 장사하는 집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관계 중심입니다. 기도, 찬양, 말씀, 회개, 헌신은 모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반면 장사하는 집은 결과 중심입니다. 효율, 수치, 매출, 성장, 그 모든 기준은 철저히 인간의 계산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자주 빠지는 유혹이 바로 이 거래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께 봉사했으니 축복을 받을 것이다, 기도했으니 응답이 와야 한다는 사고는 거래입니다. 신앙은 교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으로 매겨질 수 없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은 거래를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무 대가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거래하지 않으셨고, 교환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자신을 쏟으셨습니다. 그 은혜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 신앙은 아버지의 집을 지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장사하는 집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는가. 교회는 과연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우리 안의 상을 주님이 뒤엎으시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여 상 하나를 부수면 전체 구조가 흔들릴까ㅇ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제로 어떤 교회들은 성장이 멈추자 기도보다 전략 회의를 먼저 열었습니다. 헌신이 식자 교육보다 인센티브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민낯이라면,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래가 아닌 예배로, 계산이 아닌 사랑으로 말입니다.
결론
요 2:16은 예수님의 분노를 담은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분의 거룩한 사랑의 외침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 외침은 오늘도 우리의 심령에, 교회 안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성전을 뒤엎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분은 파괴자가 아니라, 회복자이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되찾으시려는 분입니다. 교회를 향한, 성도를 향한 그 열심은 오늘도 식지 않았습니다.
그 열심 앞에 나아갑시다. 내 안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사랑을 다시 배웁시다. 내 손의 상을 내려놓고, 무릎 꿇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갑시다. 아버지의 집, 그분의 임재와 은혜가 머무는 집을 다시 세워가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이 그 회복의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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