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토요일 행적, 침묵 속에서 준비되는 부활의 아침
고난주간 토요일, 침묵 속에서 준비되는 부활의 아침
고난주간의 토요일은 성경에서 많은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겉으로는 고요하고 침묵에 잠겨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식하시며, 제자들은 슬픔과 혼란 속에 잠겨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부활 소문에 대비하여 무덤을 지키려 했습니다. 이 날은 ‘거룩한 토요일’이라 불리며, 인간의 눈에 보이는 활동은 없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잠잠히 준비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침묵의 날 속에서 기다림의 신앙과 소망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무덤 속에서 안식하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27:57-66, 마가복음 15:42-47, 누가복음 23:50-56, 요한복음 19:38-42)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정중히 수습됩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의 몸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 새 무덤에 안치합니다. 요한복음은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준비해 장례를 도왔다고 기록합니다. 두 사람은 유대 공회원으로, 이전에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따르지 못했던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계기로 신앙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 장면은 고요한 헌신과 사랑의 예입니다. ‘안치하다’는 헬라어 ‘티데미(τίθημι)’는 단순히 놓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소중히 두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자리하게 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수치와 고통 속에서 죽임당하셨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경외심을 가진 자들의 손에 맡겨져 조용히 안식하십니다.
예수님의 무덤 안식은 창조 첫째 주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과 연결됩니다. 창세기의 안식일은 창조 사역의 완성을 뜻했다면, 이 날은 구속 사역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을 여시고, 그 구속을 완성하시고 무덤에서 잠드십니다.
우리 삶에도 이러한 침묵의 시간이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부활의 아침은 반드시 다가옵니다.
무덤을 지키는 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경계 (마태복음 27:62-66)
이 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경비병을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적들이 그 말씀을 기억하며 행동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비병을 보내고, 돌 무덤 입구를 봉인하게 합니다. 이는 정치적, 종교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의미하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혹시라도 일어날 경우 자신들의 체제와 권위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봉인하다’는 헬라어 ‘스프라기조(σφραγίζω)’는 단순한 물리적 봉인이 아니라, 권위 있는 선언과 권한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돌을 굴리고 봉인을 하고 병사들을 세워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한 장벽을 쌓아도 부활의 능력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며 무덤을 막으려 하지만, 부활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세상의 조롱과 방해 속에서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제자들의 침묵과 기다림의 시간 (누가복음 23:56)
예수님의 장례 이후, 여인들은 안식일을 준비하고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니라”고 단 한 줄로 이 날의 분위기를 전합니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여인들은 잠잠히 슬픔을 견디고 있었으며, 공동체는 침묵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상실감과 혼란,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인간의 시선으로 파악되지 않는 ‘숨은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활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러한 침묵과 죽음의 시간을 거쳐 오기 때문입니다.
‘쉬다’는 헬라어 ‘헤수카조(ἡσυχάζω)’는 단지 잠잠히 있는 것을 넘어, 내면의 동요와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안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이 ‘쉬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통해 ‘기다림의 영성’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며 침묵 중에도 신뢰하고, 고요한 무덤의 시간에도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결론
고난주간의 토요일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날이며, 제자들과 여인들은 침묵 속에서 기다림과 슬픔을 겪었던 날입니다. 그러나 이 침묵은 절망이 아닌 준비의 시간이며, 어둠이지만 곧 빛이 비칠 전조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의 시간과 방식과는 다르게, 가장 조용한 순간에 가장 위대한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통해 ‘기다림의 신앙’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의 날이 지나도 아직 부활의 아침은 오지 않은 그 중간의 시간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붙들고 있는지, 얼마나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덤 속에 계신 예수님은 실패한 분이 아니라, 구속을 완성하시고 잠시 안식하신 주님이십니다. 이 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침묵은 결코 무기력이 아닌, 부활을 위한 숨 고르심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활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임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그 침묵을 견디고, 곧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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