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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수요일 행적, 배신과 헌신이 교차하는 날

bibletopics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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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수요일, 배신과 헌신이 교차하는 날

고난주간의 수요일은 복음서 안에서 직접적으로 많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고요한 침묵 가운데 깊은 영적 긴장과 대비가 감돌던 날이며,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결정적인 계획들이 숨겨져 진행되던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활동하셨다는 기록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선택과 반응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장면들이 중심을 이룹니다. 특별히 이 날은 한 여인의 순전한 헌신과 한 제자의 탐욕과 배신이 극적으로 대비되며,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도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 날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순전한 사랑을 드러내다 (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 요한복음 12:1-8)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벳바게와 예루살렘을 오가시며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이 날 예수님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고, 그곳에서 한 여인이 매우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또는 발)에 부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마리아로 명확히 지칭하며, 그녀가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고 기록합니다.

이 향유는 ‘나르도스 피스티코스(νάρδος πιστικός)’로 불리며, 인도에서 수입한 최고급 향유였습니다. 당시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1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여인의 행위는 경제적인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아낌없이 드린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가리켜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좋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칼론(καλόν)’으로, 도덕적 선함을 넘어 아름답고 귀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예언적 행위로도 해석됩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시신에 향유를 붓는 것이 장례의 관습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급히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례 준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실 상황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성령의 감동으로 미리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깁니까?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향유, 곧 시간과 마음과 헌신을 부어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의 순전한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전이 됩니다. 향유는 깨뜨려져야 향기를 발합니다. 우리의 자아와 고집도 주 앞에 깨뜨려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 탐욕이 초래한 어둠 (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 누가복음 22:1-6)

바로 이 헌신의 장면 이후, 복음서 기자들은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길 계획을 세우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은 "그 때에"라는 시간 부사를 사용함으로써, 향유 사건과 유다의 배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분노와 실망을 품고,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질문은 매우 차갑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면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주려느냐?”

‘넘겨주다’는 단어는 헬라어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로, 단순히 인도한다는 의미를 넘어 배신과 고발의 뉘앙스를 포함합니다. 유다는 이 거룩한 스승을 단 30세겔, 곧 노예의 값에 넘기기로 합니다. 이는 출애굽기 21장 32절에서 언급된 소에 의해 죽은 노예의 배상금과 같은 액수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얼마나 낮은 대우를 받으셨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기록하며, 그의 선택이 단지 개인의 의지만이 아닌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유다는 스승의 권위를 직접 체험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보았고, 함께 떡을 나누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합니다. 이 모습은 단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종종 주님을 향한 신뢰보다 자신의 이해타산과 욕망을 앞세울 때, 유다의 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오기 전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입을 맞추며 배신하던 그 순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 말은 유다에게 주시는 마지막 기회요, 회개의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그 문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언제나 오래 참으심의 표현이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입니다. 우리는 그 음성을 결코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제사장들의 음모와 예수님을 향한 저항 (마태복음 26:3-5, 마가복음 14:1-2, 누가복음 22:1-2)

수요일의 또 하나의 흐름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를 죽일 모의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예수를 체포하고 죽일 것인지를 은밀하게 논의합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민중의 지지를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불법적인 모의를 꾀합니다.

그들의 결정은 ‘명절에는 하지 말자’였습니다. 이는 6월절이라는 절기 동안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의 의도를 넘어서 십자가의 사건이 정확히 유월절에 성취되도록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기 위해 정해진 때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고,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계산을 넘어 역사하십니다.

‘음모하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불레우오(βουλεύω)’로, 모의하다, 계획하다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종종 악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비밀스럽게 회의를 열고 음모를 꾸밀 때 사용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거룩해야 할 자리에 있던 이들이 가장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의 자리에서도 깊은 반성과 경고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종종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권력을 추구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선과 싸우기 위해 오셨고, 그 싸움의 끝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주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적은 언제나 외부의 박해보다 내부의 위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고난주간 수요일은 겉으로는 조용한 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격렬한 내면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던 날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헌신은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의 표현이었고, 가룟 유다의 배신은 탐욕과 자기중심성이 부른 비극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는, 신앙의 자리를 악으로 오염시킬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이날의 사건들은 모두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고, 모든 어둠과 배신을 넘어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수요일의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향유를 붓는 자입니까, 은삼십에 주님을 넘기는 자입니까? 주님의 침묵 앞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 고난주간 수요일, 우리의 마음을 열고 다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향유를 깨뜨렸던 그 여인처럼,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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