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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월요일 행적 정리

bibletopics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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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월요일, 예수님의 의로운 분노와 순전한 권위

고난주간의 둘째 날, 곧 월요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루신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로 채워집니다. 이 날은 단순한 성전 방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의 마무리 과정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백성의 참된 경건을 회복하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이 하루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모습이었고, 당시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깊은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고난주간 월요일의 사건들을 되새기며, 예수님의 공의와 거룩함, 그리고 우리를 향한 참된 회복의 초대가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려 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 (마태복음 21:18-19, 마가복음 11:12-14)

고난주간 월요일 아침,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중 시장하셨습니다. 그때 길가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고, 그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고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서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바로 성전 정화 사건과 연결시켜 기록하고 있으며, 마가는 이 사건을 전후로 성전 정화 사건을 끼워 넣어 구조적으로 무화과나무 저주가 성전의 부패와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잎이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나무처럼, 외형은 종교적이고 경건해 보일지라도 실상은 열매 없는 믿음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배고픔 때문에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저주하신다’는 헬라어 ‘카타라오마이(καταράομαι)’는 단순한 심리적 분노가 아닌, 하나님의 심판적 선언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연물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열매 맺지 못할 때 겪게 될 심판을 상징하는 예언적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혹시 잎사귀만 무성한 신앙은 아닌지,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외적인 경건함보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진정한 순종과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 (마태복음 21:12-17, 마가복음 11:15-18, 누가복음 19:45-4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뜰에서는 비둘기를 파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재물을 거래하는 상인들이 활발히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행동하십니다. 상인들의 상과 의자를 뒤엎으시고, 그들을 성전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이었던 성전이 상업주의와 종교 형식주의로 오염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 56장 7절과 예레미야 7장 11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래 성전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과, 백성들이 그것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대조하는 선포입니다.

성전은 ‘기도의 집’이어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이며, 은혜와 자비의 통로였습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과 상인들은 이 거룩한 장소를 착취의 공간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은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가 돌아오심을 의미하며, 타락한 종교 시스템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예표적 행위입니다.

이 사건은 ‘청결’이라는 단어에 담긴 깊은 상징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헬라어 ‘카타하이로(καθαιρῶ)’는 씻어내고 제거한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이는 성전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에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임하시어 모든 탐욕과 위선을 쫓아내시고, 기도의 자리로 회복시키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받으심 (마태복음 21:14-16)

성전을 정화하신 이후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장면은 그분이 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장면이며, 거룩한 공간에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병자들이 치유받는 이 장면은 단지 육체의 치유를 넘어서, 메시아가 오실 때 회복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동시에 어린아이들이 성전 안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아이들의 외침에 분노하지만, 예수님은 시편 8편 2절을 인용하시며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고 응답하십니다. 여기서 ‘찬미’는 헬라어로 ‘아이노스(αἶνος)’로, 단순한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감사와 인정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들, 어린아이들과 병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땅 가운데 임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롭고 강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 순전한 자들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진정한 예배는 교리적 정통만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순전한 찬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어떤 예배자로 서 있습니까? 화려한 성전, 제도와 절차는 있지만 정작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과 회개의 눈물은 사라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깨끗한 마음과 찢어진 심령을 찾고 계십니다. 진정한 회복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결론

고난주간의 월요일은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영적으로는 격동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열매 없는 신앙의 허상을 드러내시고, 성전 정화를 통해 하나님의 집을 회복시키셨으며, 병자들을 고치시고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받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영광이 어디에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하루는 단지 예언의 성취나 상징적 행위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 안의 성전은 얼마나 깨끗한가? 우리는 진정 주님 앞에서 병든 심령을 고치며,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찬양하고 있는가?

고난주간의 시간은 단지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는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정결케 하며, 주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 월요일, 예수님의 공의와 사랑이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어, 진정한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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