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가야바와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
가야바와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 침묵으로 이룬 구속
마태복음 26:57–27:26은 예수님께서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무고한 고소와 거짓 증거 앞에서도 예수님은 대부분 침묵하셨고, 결국 군중의 외침과 정치적 계산 속에 십자가 형이 선고됩니다. 이 본문은 진리의 침묵이 세상의 거짓보다 위대함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침묵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는 순종의 표현이었음을 드러냅니다. 고난주간의 중심에서 이 침묵은 우리에게 말 없는 사랑의 깊이를 묵상하게 합니다.
거짓과 왜곡의 법정, 가야바의 재판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체포된 후 곧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갑니다. 이미 공모된 판결을 위한 형식적인 재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 예수님을 고소하려 하지만, 증언들이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두 증인의 말이 일치해야 유죄로 판결할 수 있었지만(신명기 19:15), 이들은 위증에 의해 진리를 억누르려 했습니다.
한 증인은 예수님의 말을 왜곡하여 "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제 말씀은 요한복음 2:19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으로, 이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거짓은 진리의 단어를 차용하지만, 본질을 왜곡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결국 예수님께 직접 묻습니다. "내가 너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이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시며, 이어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다니엘 7:13-14의 예언을 인용한 말로, 메시아의 신적 권위와 종말의 심판자로서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 대답은 공회원들의 분노를 자극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단정하고, 사형을 언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을 마음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에 분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조롱하는 말로 그의 위엄을 짓밟습니다.
예수님은 이 재판에서 대부분 침묵하셨습니다. 헬라어 siopao는 '말을 하지 않다, 고요히 있다'는 뜻으로, 예수님은 자기 변호를 하지 않으시고, 억울함을 말로 풀지 않으셨습니다. 이 침묵은 무력함이 아닌 의도된 순종이었습니다. 이는 이사야 53:7의 예언처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다"는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조롱을 감당하셨습니다.
침묵으로 증언하신 메시아
가야바의 재판 후 예수님은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집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성모독을 근거로 사형을 주장했지만, 로마 총독에게는 정치적 반역자로서 고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한 자, 곧 로마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포장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간단한 대답 외에 예수님은 고소자들의 수많은 비방에도 침묵하십니다. 마태복음 27:14은 "예수께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고 전합니다. 로마 재판 절차에서는 피고가 자기변호를 하지 않으면 불리한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분의 침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인간의 말로 논쟁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진리 자체이셨기에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가 증거가 되었습니다. 침묵은 때로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무기력함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에 순종하며 고난을 감당하는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억울한 상황에서, 진실이 왜곡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예수님은 불의 앞에서 분노와 폭력을 선택하지 않으셨고, 침묵과 사랑으로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불의한 세상 속에서 진리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되묻게 합니다.
진리 앞에서 외면한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공표했습니다. 그 아내는 꿈을 꾸고 "그 의인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전했으며,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을 풀어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군중의 외침과 정치적 계산 앞에 무너집니다.
유월절이 되면 총독은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바라바는 폭도요, 살인자였습니다. 진리를 외면한 대중은 오히려 죄인을 선택하고, 의인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자신이 이 피에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지만, 그의 중립은 죄 없는 자를 사형에 넘김으로써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됩니다. 진리 앞에서의 중립은 곧 진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타협은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을 멈추지 못했고, 오히려 그것을 완성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과정에서 아무 말씀도 없이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그의 침묵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구원의 문을 여는 능동적인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감내하셨고, 거짓과 위선의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말 없는 복음을 세상에 전하셨습니다.
결론
마태복음 26:57–27:26의 본문은 침묵 가운데 이루어진 구속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거짓 증언과 왜곡된 재판, 정치적 거래와 대중의 맹목 속에서도 침묵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단지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이 침묵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고난을 감당하셨고,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침묵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거짓과 소음으로 가득하지만, 진리는 침묵 속에 더 분명히 들립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진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침묵을 무시할 것인가?" 이 고난주간, 우리는 말 없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다시 한 번 복음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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