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강도에게 주신 약속
누가복음 23:26-43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향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여정과, 그 길 위에서 만난 예루살렘 여인들과의 대화,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두 강도와 나누신 마지막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지 고난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회개하는 한 죄인에게 천국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구속의 은혜와 복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이는 죄와 고통의 자리에 임한 하나님의 자비요, 십자가에서 펼쳐진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행보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은 뒤,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갑니다. 누가복음은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를 함께 조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밤새도록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질과 조롱 속에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런 예수님께 병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셨으나, 그 무게조차 감당할 수 없었기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게 됩니다.
시몬은 갑작스럽게 동원된 인물이었지만, 그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참여하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억지로 지웠다"는 헬라어 epitithemi는 물리적으로 위에 놓는다는 뜻으로,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 강제성은 은혜의 초대가 되었고, 시몬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에 첫 번째 동행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아들들이 초대교회에서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을 언급하며, 시몬의 삶이 이 사건을 통해 변화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무거웠지만 분명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감당하기 위해 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의 발걸음은 고통의 걸음이자, 동시에 인류를 향한 구원의 걸음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예언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때의 고통이 이제 십자가 위에서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주신 경고
예수님의 고난을 지켜보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군중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삶과 사역을 가까이서 지켜본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며 슬피 울고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애통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매우 신학적이고 예언적인 메시지를 주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씀은 단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며 주시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 그리고 심판의 날에 있을 참혹함을 내다보며 말씀하십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역설적 선언은, 너무도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는 생명을 낳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감정적 표현이 아닌, 종말론적 두려움에 대한 메시지이며, 지금 회개하지 않는 세대를 향한 깊은 탄식이었습니다.
"산들을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는 말씀은 호세아 10:8의 인용으로, 죄악의 무게 앞에 고통과 죽음조차 피난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단지 한 시대의 멸망이 아닌, 회개 없는 삶이 결국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되는지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여인들에게 향한 말이지만, 사실 그 울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무엇에 울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울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고난의 길은 단지 슬픔과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되돌아보고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입니다. 그분은 자기 고난보다도 우리 모두의 회개와 구원을 더 깊이 원하셨습니다. 눈물은 누구나 흘릴 수 있지만, 회개로 이어지는 눈물만이 생명을 낳습니다. 고난주간의 중심에서 우리는 단지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인과 함께 하신 구속의 대화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이는 메시아가 범죄자들과 같은 자리까지 내려오셨음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이사야 53:12에서 예언된 바대로, 예수님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셨고, 그들과 함께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가장 밑바닥까지 사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멸시받는 자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듯,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원했던 능력 중심의 메시아상, 자기 이익을 위한 구원자상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 침묵은 거절이자 경고이며, 또한 거룩한 인내입니다.
다른 한 강도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무죄함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는 단순히 잘못했다는 사과가 아니라, 스스로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을 단지 불쌍한 처지의 동료가 아니라, 장차 다시 오실 왕으로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이 간구에 즉시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사용된 amen lego soi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확언의 표현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낙원"은 paradeisos로, 에덴동산의 회복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구원의 장소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공로와 행위에 의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한 마디의 회개와 믿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결정이 되는 장면은, 복음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장 낮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예수님의 은혜는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속에서도 타인의 구원을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회개하는 죄인을 품으셨고,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생명을 창조하며,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의 상징이 되었고, 그 위에서 흘러나온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결론
누가복음 23:26-43은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 속에서 만난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 복음의 핵심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 슬피 울던 여인들, 그리고 십자가 위의 강도까지, 모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의 방식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향해 사랑을 베푸셨고, 고통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와 심판을 대신 지셨으며,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문을 여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는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시몬처럼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여인들처럼 감정에 머무르고 있는가, 아니면 강도처럼 주님께 나를 기억해 달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여전히 낙원의 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그 자리에서 구원은 시작됩니다. 주님,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희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은혜로 우리를 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오늘도 우리가 무릎 꿇고, 다시 고백하기 원합니다. "예수여, 나를 기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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