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유다의 입맞춤과 제자들의 도망
유다의 입맞춤과 제자들의 도망
마태복음 26:47-56과 요한복음 13:21-30은 예수님의 고난 중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의 도망이라는 인간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내가 교차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가까운 자의 배신과 제자들의 무기력한 뒷모습 속에서도, 예수님은 사랑과 순종, 인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본문은 인간의 죄된 모습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구속 의지가 얼마나 단호하고 자비로운지를 드러냅니다. 고난주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배신과 도망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 계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배신의 손길
겟세마네의 기도가 끝난 직후, 마태복음 26장 47절은 곧바로 긴박한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를 이끌고 등장합니다. 그들은 칼과 몽치를 들고 있었으며,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한 유다는 신호를 정해 두었습니다. 바로 입맞춤이었습니다. 당시 입맞춤은 제자와 스승 사이의 애정과 존경을 나타내는 표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거룩한 행위를 배신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라삐여 안녕하시옵니까"라는 인사와 함께 입을 맞춘 유다의 모습은 형식은 남았지만 마음은 떠난 위선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여기서 "친구여"는 헬라어로 hetairos이며, 이는 단지 정서적 친밀함이 아닌 공식적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를 정죄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유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칼과 몽치를 든 무리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지키려는 제자들을 제지하십니다.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제자에게,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하시며, 폭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부를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지만, 스스로 그 권능을 내려놓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이는 예언이 이루어지고, 구속의 사명이 완성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이 태도는 인간의 죄성과 대비되어 더욱 빛납니다. 배신과 폭력, 두려움으로 가득 찬 인간의 어두운 본성 속에서도, 예수님은 빛으로서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이미 정해졌고, 그 길에서 예수님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고요한 식탁 위에 내린 예언의 그림자
요한복음 13장은 유월절 만찬의 현장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식사 도중 예수님은 제자들과 나누는 깊은 교제를 이어가시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21절에 이르러 예수님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마음이 괴롭다고 밝히십니다. 헬라어로 "괴로워하다"는 tarasso이며, 이는 내면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신적 전지하심으로 유다의 행동을 아셨지만, 그것이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수군댑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베드로는 그에게 신호를 주어 누가 배신자인지를 물어보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며 유다에게 떡을 주십니다. 이는 단지 배신자를 지목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장면입니다.
떡을 받자마자 유다 속에 사탄이 들어갔다는 표현은 이 사건의 영적 전쟁성을 드러냅니다. 악한 영이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틈타 결정적인 죄의 자리로 이끌어가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중 아무도 유다가 무슨 일을 하러 나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는 그가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를 하러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외형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경험했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선택은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십자가로 이어지는 구원의 여정이었습니다.
배신 속에 머무는 사랑의 침묵
유다의 배신은 인간 죄악의 결정적 사례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르며 사역을 함께했던 자가, 은삼십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은삼십은 출애굽기 21장에서 종의 값으로 명시된 액수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배신당함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헐값에 여기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메시지는, 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무슨 행동을 할지를 아셨고, 제자들이 도망칠 것도 아셨으며,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고, 유다의 발을 씻기셨으며, 그를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되지만, 용서는 그 아픔을 품는 데서 완성됩니다.
고난주간을 살아가는 우리도 유다와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로는 따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그분을 파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앞에 떡을 내밀고 계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유다의 배신보다 더 깊은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며, 제자들의 도망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인내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인간의 실수와 연약함조차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도 일하시며, 예수님은 그 실패를 감당하시기 위해 고난을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사랑의 결정체이며, 유다의 입맞춤과 제자들의 도망은 그 사랑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결론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의 도망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사랑하셨고, 침묵하셨으며,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배신자와 도망자의 자리에 서 있을 때조차도,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유다와 제자들의 모습 속에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입맞춤의 외식과 도망의 두려움을 내려놓고, 침묵 속에서 묵묵히 순종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배신했고 도망쳤을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사랑을 이제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수난의 걸음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복음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앞에 우리는 회개하며, 다시 그 길을 따르는 제자로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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