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가시관을 쓰신 주님
가시관을 쓰신 종: 멸시받는 메시아의 길
마가복음 15:16-20과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과 멸시의 깊이를 조명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의 조롱 속에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혀지며 유대인의 왕이라 희롱당하십니다. 이 모습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고난받는 종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형벌을 받으셨으며, 채찍에 맞아 우리에게 나음을 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이 단순한 인간적 고난이 아니라, 구속의 사명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도된 희생임을 밝히 보여줍니다.
조롱의 왕관 속에 감추어진 영광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절정으로 향하는 순간들을 담고 있습니다. 빌라도에게서 형이 확정된 후,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집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브라이토리온"(praitorion), 즉 총독 관저 안으로 끌고 들어가고, 전체 부대를 불러 모아 공개적으로 그를 조롱합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외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왕에 대한 경의가 아닌 조롱이었습니다.
자색 옷은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복장이지만, 예수님께 입혀진 자색 옷은 모욕의 도구였습니다. 가시관은 고통의 장신구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왕의 권위가 없다"는 조롱을 상징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머리를 갈대로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으며 비웃는 연극을 벌입니다. 외형은 왕의 대접을 흉내내지만, 그 의도는 철저한 모욕과 폭력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왕이 진짜 왕관을 쓰시고 있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그것이 가시로 엮여 있고, 모욕 가운데 씌워졌지만, 이 가시관은 인류의 죄를 짊어진 메시아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욕의 순간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조롱의 자리에 남아 계셨고,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은 단지 육체적 조롱이나 인간의 악함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인간의 죄악 속에서도 드러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능히 하늘의 천사들을 불러 그 상황을 멈출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셨고, 그 신성을 악의적인 조롱 앞에서도 결코 무너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며, 그분의 면류관은 영광이 아니라 가시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인류의 타락과 죄가 메시아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조롱합니다. 예수님의 침묵과 수용은 인간의 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죄를 어떻게 끌어안아야 구원이 시작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의 예언과 메시아의 고난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실로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사야 53:3-4)이라는 말씀은 마가복음의 수난 기사와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 보기에 아무런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철저히 무시당한 자였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기서 "찔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דָּקַר (다카르)은 칼이나 창에 찔리는 폭력적인 상처를 뜻하며, 이는 예수님의 못 박힘을 예표합니다. "상함"은 דָּכָא (다카아)로, 으깨지다, 부서지다라는 의미로, 심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영혼의 고통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전인격적인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분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분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샬롬(שָׁלוֹם)입니다. 예수님의 징계는 단지 율법적 저주의 성취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는 문을 여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각기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고,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이사야 53:6). 이는 대속의 핵심입니다. 대속은 단지 죄의 용서가 아니라, 대신 짊어지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 대속의 사명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몸소 감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은 필연이었고, 그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사건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나 신학적 상징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제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하시고, 그 예언을 실제로 성취하심으로 그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일관된 구속의 섭리는 예수님께서 단순한 예언의 수혜자가 아니라, 그 성취자이심을 보여줍니다.
채찍과 침묵, 대신 맞은 그분의 상처
예수님은 억울한 재판과 조롱 속에서도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앞부분에서도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거의 침묵하십니다. 이사야 53:7은 이 침묵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였도다." 예수님은 침묵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죄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셨습니다.
병사들의 채찍질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찢었습니다. 채찍에는 금속과 동물 뼈가 박혀 있었고, 매질은 살점을 뜯어내는 고통을 수반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끝까지 사랑으로 고난을 감당하셨고, 사람들의 조롱조차도 구속의 도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을 대신 받으셨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의 상처는 단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향한 치유의 손길입니다. 그의 침묵은 단지 무언의 항변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말 없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지금도 우리를 향한 은혜의 통로로 살아 있습니다. 그 피는 구약의 희생제사와 같이,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는 단번의 제사로서 기능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은 "그가 한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분의 고난은 역사 속 사건이면서도, 영원한 능력으로 지금도 구원을 이룹니다.
결론
마가복음 15:16-20과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고난의 의미를 깊이 있게 보여줍니다. 가시관은 조롱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메시아의 왕관이 되었고, 채찍과 조롱은 멸시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 가운데 고난을 감당하셨고, 그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없이 증거한 가장 위대한 설교였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멸시받으신 메시아, 가시관을 쓰신 왕, 침묵하신 구속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그분이 입으신 자색 옷은 우리에게 의의 옷이 되었고, 그분의 가시관은 우리를 위한 생명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의 깊이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수모와 멸시 앞에, 우리의 삶을 다시 정결히 드려야 합니다. 고난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피 흘려 증명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 앞에 진실로 응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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