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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2-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bibletopics 202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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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을 되찾는 주님의 분노

고난주간의 한복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면을 연출하셨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 분노하셨고, 온유와 겸손의 왕이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13절은 이 사건을 담담하게 기록하지만, 그 깊은 의미는 십자가의 구속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성전과 예배, 그리고 거룩을 되찾으시는 주님의 심정을 함께 묵상해 봅니다.

부패한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은 이미 기도의 집이 아닌 장사하는 자들의 시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절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정리나 권면이 아닙니다. 이는 의도적이고 결단력 있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단지 장사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본질은 거룩한 성전이 사람의 욕망과 이익으로 더럽혀졌다는 데 있습니다. “성전”(ἱερὸν)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장소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공간이 탐욕과 형식에 사로잡힌 인간의 장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내쫓으시며’라는 말은 헬라어 ‘ἐξέβαλεν’에서 왔는데, 이는 강한 의지를 담은 단어로, 마치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된 표현과 같습니다. 즉 예수님은 탐욕에 물든 이들을 단순히 경고하신 것이 아니라, 성소에서 쫓겨나야 할 존재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고난주간이라는 시간과 절묘하게 맞물립니다. 예수님은 곧 자신의 몸을 찢어 새로운 성전을 세우실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낡고 부패한 성전의 민낯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 장면 앞에서 자문해 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떤 성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예배의 이름으로 나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내 자리를 지키려는 종교적 위선이 내 안에 있지는 않은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예수님은 분노의 이유를 곧장 이사야서 56장 7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이라는 이 선언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를 회복시키려는 예수님의 깊은 갈망이 담긴 외침입니다.

‘기도하는 집’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개인적인 간구의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어상 ‘기도’(προσευχ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교제, 경외, 찬양, 회개의 모든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즉 성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자리이며,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그 공간을 자신들의 권력과 통제 수단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공간에 상인들을 배치함으로써, 하나님을 찾고자 오는 이방인들의 접근조차 막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확장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가로막는 무서운 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단지 장소 정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시키려는 행위입니다. 고난주간의 그분은 단지 고통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를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로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지금 ‘기도하는 집’입니까? 우리 가정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처소입니까? 혹은 체면과 관습, 사람 눈치와 구조적 형식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밀려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예수님은 이어서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십니다.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적 심판 선언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백성들은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동시에 도둑질과 살인, 간음을 일삼았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이곳은 여호와의 성전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며, 성전조차 버리셨습니다.

지금 예수님도 동일한 상황을 마주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했습니다. 화려한 건물, 정교한 제사 시스템, 빈틈없는 제례적 절차.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도, 진실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칭하신 것입니다.

‘강도’(λῃστῶν)는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폭력을 동반한 약탈자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예배의 형식을 통해 영혼을 약탈하고, 진리를 왜곡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고난주간의 예수님이 성전에 오신 이유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단지 고통이 아닌, 타락한 예배를 도려내고, 거룩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어 새 성전을 세우시되, 그 전에 부패한 성전과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오늘도 그 성전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뒤엎어야 할 상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뒤엎으십니다.

결론

고난주간의 예수님은 조용히 고개 숙인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향해 진노하시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되찾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13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삶은 지금 ‘기도하는 집’입니까? 아니면 익숙한 신앙의 습관 속에서 무의미한 제사를 드리는 ‘강도의 소굴’입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심령에 들어오셔서, 상을 뒤엎으시며 거룩을 회복하십니다. 그분의 진노는 은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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