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9:9 나귀 타신 겸손의 왕
예루살렘을 향하신 왕의 발걸음
고난주간의 시작은 승리의 외침으로 가득 찼지만, 그 외침 속에는 십자가의 고통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은 바로 그 발걸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겸손한 영광과 구속사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입성을 통해 고난주간의 신학적 본질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왕을 기다리는 마음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라는 스가랴 9장 9절의 도입은 단순한 감정의 외침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크게 기뻐하다’(גִּילִי מְאֹד)는 단어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분출을 말합니다. 단순히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기쁨을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왕은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의 권력자와는 다릅니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라는 표현은 그분의 왕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공의’(צַדִּיק)는 단지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구원’(נוֹשָׁע)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동적 구원의 행위를 나타내며, 이 왕이 단순히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아니라 구원의 통로 그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고난주간은 바로 이 왕이 우리의 심령 안에 어떤 존재로 임하시는지를 되묻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호산나 외치는 입술은 있지만, 정작 그분이 걸어가시는 고난의 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의 왕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겸손히 오시는 왕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는 구절은 이 예언의 절정을 이룹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은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나, 위대한 승리를 거둘 때에는 말을 타고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상징은 언제나 나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평화의 표식을 택하셨습니다.
‘겸손하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עָנִי’로, 단순한 태도의 겸손을 넘어서 고난받는 자, 가난한 자를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는 것은 그분이 스스로를 낮추어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다는 강한 신학적 상징입니다. 바울은 이를 빌립보서 2장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호산나’는 참된 메시아의 길을 이해한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해방자를 기대했으며, 영광과 기적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대를 외면하시고, 오히려 조용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의 낮아지심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길이었고, 그 길은 영광의 길보다 먼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공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자리
스가랴 9장의 이 장엄한 예언은 단순한 장면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시편 85편 10절의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공의와 평화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로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죄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이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 공의가 평화의 길로 전환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동시에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대속적 속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 위에 온전히 쏟아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은 이 거룩한 교차점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이유는, 그분께서 공의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 공의는 우리를 향한 형벌로 향해야 했지만, 예수께서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결론
고난주간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왕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신 왕, 겸손하고 고난받는 왕, 그러나 의와 평화의 왕. 스가랴의 예언은 단지 과거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심령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 왕의 길은 십자가였고, 그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오늘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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