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28 - 19:48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 걸어가시는 주님
눈물의 왕, 평화의 길을 걷다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 그 발걸음 하나하나에 담긴 복음의 무게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이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그 도성에서 흘리신 눈물, 그리고 성전 정결의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닌, 구속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따라 주님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이 땅에 오신 평화의 왕께서 어떤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셨는지를 깊이 묵상해보려 합니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분의 눈물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분의 분노 속에 감추어진 거룩한 사랑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그 걸음은 곧 우리 걸음이 되고, 그 슬픔은 우리의 중보의 기도가 됩니다.
준비된 순종의 자리(눅 19:28-35)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감람산 언저리에 다다르셨을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마을로 들어가 나귀 새끼 하나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눅 19:30) 말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묘사이지만, 사실 이 구절 안에는 ‘순종의 정결함’이라는 깊은 영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나귀 새끼는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힘이나 기술로 조정되지 않은 순전한 짐승, 그 나귀를 주님이 타신다는 사실은, 주님의 왕권이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정복의 군마가 아니라, 섬김의 나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준비된 순종'이라는 개념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인 자리는 우연이 아니라 예정이며, 순종은 훈련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이 나귀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 자리에 있었고, 제자들은 그 말씀에 의지하여 아무런 논쟁 없이 나귀를 풀어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저항이 풀려나는 장면은, 말씀 앞에서 모든 권세가 무너지는 영적 역전의 상징입니다 (눅 19:31-34). 주님은 오늘도 그 말씀 한 마디로 우리의 얽힌 인생을 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환호와 오해 사이에서(눅 19:36-40)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무리는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눅 19:38). 이 외침은 분명 구약 스가랴서의 예언을 성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나귀를 타시나니” (슥 9:9) 그 예언의 한복판에서, 백성들은 소리 높여 외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은 온전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정치적 해방자,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환호는 예언을 따라 움직였지만, 그 의미는 철저히 오해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 속에 우리의 기대와 욕망이 섞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지만, 동시에 그 찬양이 올바른 인식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환호를 못마땅히 여기며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눅 19:39).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눅 19:40).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억제로 멈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계획은, 돌조차 입을 여는 찬송의 능력으로 일어납니다.
눈물의 언덕에서(눅 19:41-44)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 19:41-42). 주님의 눈물은 예루살렘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내면의 어두움과 무지를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찬양을 받으셨지만, 내적으로는 철저히 거절당하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분은, 칼과 피의 전쟁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지만, 백성들은 그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원했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인간의 오해와 영적 무지를 향한 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평화를 알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자기 방식의 평화, 자기 손익에 기반한 평화를 꿈꾸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십니다. “네 대적들이 토단을 쌓고 너를 둘러 사방에서 가두고 또 너와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눅 19:43-44). 그 멸망의 근거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너를 돌보는 때를 네가 알지 못함이라” (눅 19:44). 구원의 때를 모르고 지나간 자들에게, 남는 것은 폐허뿐입니다.
분노의 사랑, 정결의 외침(눅 19:45-48)
예수님은 곧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눅 19:46). 주님의 이 행동은 단순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온 백성의 회복을 위한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타락했습니다. 기도의 향기가 아니라 돈의 냄새가 가득했고, 회개의 통곡이 아니라 거래의 협상이 오갔습니다.
예수님의 채찍은 미움의 표현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정화의 몸짓이었습니다. 사랑은 때로 부숩니다. 무너뜨리지 않으면 다시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만 그 본래의 사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분을 죽이려 꾀했지만, 백성들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눅 19:47-48). 어둠 속에서도 빛은 말씀을 따라 피어오릅니다. 말씀은 공간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다시 깨우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 심령 속에서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주님의 어떤 얼굴을 보고 있습니까? 환호받던 나귀 위의 주님이 아니라, 눈물 흘리시는 언덕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전에서 분노하신 그분의 단호함 속에서, 거룩한 사랑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각자의 도성 앞에서 울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평화, 우리가 지나친 은혜, 우리가 거절한 기회 앞에서, 주님의 눈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마음이라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분의 눈물을 함께 흘리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상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나귀가 되어 주님을 모실 수 있다면, 우리의 입술이 침묵하는 돌들 대신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전이 기도의 향기로 가득하다면, 그분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이었고, 동시에 부활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오늘도 그 걸음에 함께 서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그 음성이 오늘 우리의 귀에 들려옵니다. 주님, 오늘도 저희에게 은혜의 때를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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