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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9-40 사두개인들의 부활이 없다는 질문

bibletopics 2025.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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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앞의 권세, 부활 너머의 세계

우리는 종종 신앙을 말할 때 ‘믿음’이라는 단어를 쉽게 씁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주님의 침묵 앞에서도 머무는 용기이고, 부활을 삶의 중심에 둔 존재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0장 19절부터 40절까지는 단지 논쟁과 답변의 형식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부정하려는 세력과 그 안에서 더욱 명료해지는 진리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겉으로는 질문하는 자였지만, 속으로는 넘어뜨리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로 공격하려 했고, 이론으로 진리를 누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질문들 속에서, 더 깊은 침묵과 더 강한 권위로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 속에서, ‘부활’이라는 믿음의 중심 축이 단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태도임을 보게 됩니다.

함정의 질문, 권세의 대답(눅 20:19-26)

예수님이 하신 비유, 곧 악한 농부들의 이야기를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그 비유 속 농부들임을 직감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그 당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눅 20:19). 복음은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진리는 위선자를 분별하게 만들고, 그들의 숨은 악을 조명합니다.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총독에게 넘기려 하여 엿보다가” (눅 20:20), “세금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눅 20:22). 이 질문은 단순한 정치적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과 현실의 충돌점을 예수님께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권력 사이에서 예수님의 입장을 흔들어보려는 시도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질문보다 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하시며 묻습니다.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입니다” 하니,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눅 20:24-25). 이 대답은 기가 막힌 전복입니다. 정치적 편가르기를 넘어, 하나님과 이 세상 권세의 본질을 꿰뚫는 선언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말은 단순히 세금을 인정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권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 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겨누고 있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이 그에게 속하듯,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절대적 요구가 이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놀랍게 여겨 잠잠하니라” (눅 20:26). 주님의 말씀은 논쟁을 잠재우는 침묵의 권세를 드러냅니다. 진리는 늘 그렇습니다. 많은 말로 변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는 존재 자체로 권세를 품고 있습니다.

부활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눅 20:27-33)

이어서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면서도, 영적 세계나 내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께 황당한 가정을 가지고 묻습니다. “형제가 일곱이 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매, 그 다음 동생이…” 하는 식으로 일곱 형제가 모두 그 여인과 결혼하고, 결국 다 죽었는데, “그런즉 부활 때에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눅 20:28-33)

이 질문은 신앙의 핵심을 희화화하는 방식입니다. 부활이라는 거룩한 진리를, 마치 법률적 복잡성이나 이성의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려는 것이지요. 그들은 부활이라는 것이 마치 지금 이 세상의 방식이 그대로 연장되는 것처럼 묘사하며,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두개인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연구했지만, 말씀의 영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문은 알았지만, 그 율법이 가리키는 영원한 생명에는 무감각했습니다.

죽음 너머, 생명의 논리(눅 20:34-38)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하면서도 깊은 세계를 열어줍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4-35). 주님은 부활이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이라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부활은 제2의 인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 방식입니다.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눅 20:36). 여기서 우리는 부활이 단지 죽음 이후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부활은 존재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전환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지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종착점이 아니며, 부활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모세오경을 인용하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모세도 가시 떨기 떨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눅 20:37-38). 이 말씀은 단순한 성경 해석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며, 그분과 관계 맺은 자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침묵의 힘, 말씀의 무게(눅 20:39-40)

이 모든 말씀을 들은 몇몇 서기관들이 말합니다.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눅 20:39). 그리고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더라” (눅 20:40). 주님의 말씀은 논쟁을 끝내는 힘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로 이기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음성이며, 진리를 직면하게 하는 거울입니다.

이 짧은 결말 속에 담긴 침묵은 중요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란 진리를 만난 자의 반응이며, 회피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그 침묵 속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지만, 어떤 이는 침묵한 채 끝까지 마음을 닫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를 침묵하게 합니다. 말문이 막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질문하며 삽니다. 왜 고통이 있는가, 왜 응답이 지연되는가, 왜 내 삶은 이렇게 복잡하고 고단한가.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질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 속에서 주님의 침묵과 권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곧 말씀이 되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끝에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방식이고, 지금을 해석하는 눈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자녀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광을 믿는 자가 아니라, 지금도 그 부활을 살아내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권위 앞에서 질문을 던지기보다, 그분의 말씀 앞에 귀 기울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논쟁을 끝내는 침묵을 줍니다. 그 침묵 앞에서 우리는 오늘도 예배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삶의 중심에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부활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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