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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 - 19:10 삭개오야 내려오라

bibletopics 2025.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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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서 내려온 영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예상 밖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인생이 계산하고 준비한 방식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틀을 깨시며 다가오십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본문은 짧지만, 영혼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며 삭개오를 만나시는 이 장면은, 죄인과 구원자 사이의 놀라운 교차점이며, 구속사의 서사 속에서 빛나는 전환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짧은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인간의 경계를 돌파하고, 어떻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는지를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잎 사이로 숨어든 갈망(눅 19:1-3)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눅 19:1). 여리고는 과거 이스라엘의 첫 정복지였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세리와 로마 군인이 넘쳐나던 도시였습니다. 어쩌면 영적 침묵이 깊은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 도시 한복판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눅 19:2). 이 말은 곧 사회적 매장과 고립을 뜻합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경멸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며, 단지 직업 때문만이 아니라, 동족의 고혈을 짜내어 부를 축적한 자로서 외면받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삭개오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다고 기록합니다(눅 19:3). 이 짧은 한 줄은 놀라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보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로막고, 그의 키가 작아 예수를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육체의 제약, 사람들의 장벽, 그리고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이 그를 예수께 나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는 ‘보려는 갈망’이 숨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무 위의 고백(눅 19:4)

그래서 그는 한 가지 행동을 합니다. 그는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눅 19:4). 이 장면은 단순한 묘사가 아닙니다. 존엄을 내려놓는 선택입니다. 당시 어른이, 특히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나무에 오른다는 것은 체면을 포기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체면을 벗고, 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나무 위는 숨어 있는 자리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그는 군중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존재였지만, 그 나무 위에서는 예수님의 시야에 들어오는 존재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도 이런 ‘영적 나무’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올라가야 할 자리, 세상의 시선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시선을 향해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삭개오는 그 나무 위에서, 외면당한 죄인의 고백 없는 고백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멈추시는 구원자(눅 19:5-7)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 쳐다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예수님은 멈추셨습니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한 사람을 위해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인격적 초대입니다. ‘너’가 아니라 ‘삭개오’라고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은 그를 죄인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로 존중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합니다(눅 19:6). 주님은 언제나 죄인과 함께 식사하셨고,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눅 19:7). 예수님은 이 수군거림을 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은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분은 거룩한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한 영혼을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변화의 열매(눅 19:8-10)

삭개오는 주 앞에 서서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 이것은 억지로 한 선언이 아닙니다. 은혜를 경험한 자의 자발적인 반응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단지 눈물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재편입니다. 그의 재정 구조, 관계, 그리고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9). 구원은 단지 그 사람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그가 속한 집 전체로 확장되는 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속사의 본질을 선언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단지 길을 잃은 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회와 하나님 앞에서 잊힌 자, 무가치하게 여겨진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를 ‘찾아’ 오셨고, 그들에게 구원을 ‘선물’하셨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삶의 중심에 삭개오의 이야기가 울려 퍼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죄의식, 상처, 외면당한 과거, 혹은 체면과 자존심이 우리를 나무 위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주님은 지금도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보기 위해 조금만 더 높이, 겸손히 올라간다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성도 여러분, 삭개오처럼 체면을 내려놓고 은혜를 사모합시다. 숨어 있지만, 갈망으로 가득 찬 자리에서 주님을 기다립시다. 그분은 멈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과의 그 만남이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는 역사의 전환점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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