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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 - 20:18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bibletopics 2025.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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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히는 돌, 그러나 기초가 되시는 주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가볍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넘어서, 그분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권위는 관계를 결정하는 능력이며, 주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관계는 그분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순복 위에 세워져야만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0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단순한 논리 싸움이 아니라, 영적 권위를 둘러싼 충돌이며,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뜻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현장입니다. 이 본문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리고 그 권위 앞에서 인간이 선택해야 할 태도에 대해 깊은 묵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것이며,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며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권위의 질문, 도전의 함정(눅 20:1-8)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다가와 물어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그 권위를 주었느냐?” (눅 20:2) 이는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도발이었습니다. 종교 권력자들이 던진 이 질문은 사실상 예수님의 사역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일련의 행동이 자신들의 권위를 침범한다고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눅 20:4) 이 질문은 예리한 검처럼 그들의 의도를 찌릅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며 말합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백성이 돌로 칠 것이라…” (눅 20:5-6) 결국 그들은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눅 20:7).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반문은 단순한 말재주가 아닙니다. 권위에 대한 진정한 수용은 마음의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심으로써, 이미 그들의 심령이 진리에 열려 있지 않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권위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식의 도구로 탐색하려 합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 앞에서 삶 전체를 내려놓고 듣고자 합니까? 주님의 권위는 인간의 논리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픔(눅 20:9-12)

이어지는 비유는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반역을 구속사적으로 펼쳐 보이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주인은 때가 되자 소출을 받기 위해 종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종을 때리고, 욕하고, 내쫓았습니다 (눅 20:10-12).

 

여기서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처럼 가꾸셨고,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회개를 요청하셨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선지자들을 거절하고 죽였습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담은 절규입니다. 그분은 한 번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반복하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기회를 외면하고, 자신이 포도원의 주인인 양 행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이라는 포도원을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들입니다. 그 포도원은 나의 시간이기도 하고, 나의 직장과 가정이기도 하며, 내게 주어진 은사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때가 되면 그 열매를 찾으러 오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들의 비극, 거절된 사랑(눅 20:13-15)

종들이 무시당하고, 학대받고, 쫓겨났을 때, 주인은 마지막 카드를 꺼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를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눅 20:13). 그러나 농부들은 서로 의논하여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눅 20:14). 결국 그들은 그를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입니다 (눅 20:15).

 

이 장면은 구속사의 절정, 곧 십자가를 예고하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무참히 거절당했고, 하나님의 마지막 손길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마음 아픈 구절은 ‘그들이 혹 그를 존대하리라’는 주인의 기대입니다. 이 한 마디에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대하셨습니다. 혹시라도, 한 사람이라도, 그 아들을 알아보고 받아줄까 싶어 그분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묵상해야 합니다. 나는 그 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주님은 지금도 사랑을 기대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기대를 짓밟는 대신, 눈물로 받아들이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딪히는 돌, 깨어지는 교만(눅 20:16-18)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눅 20:16). 무리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어서 성경을 인용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눅 20:17). 이어지는 경고는 무섭도록 분명합니다. “그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그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트리리라 하시니라” (눅 20:18).

 

이 ‘머릿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건축자들, 곧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거절당하셨지만, 하나님은 그 돌을 구원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이 돌 앞에 서야 합니다. 어떤 이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고, 어떤 이는 그 돌 위에 세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 삶의 모퉁이 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앞에서 교만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돌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위한 기초이자, 심판을 위한 기준입니다. 우리는 이 머릿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까?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20장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누구의 권위를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삶은 단순히 그분을 믿는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말씀 앞에 나를 낮추고, 그분의 뜻 안에 내 뜻을 묻어두는 삶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종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보내셨던 그 주인처럼, 여전히 우리 인생의 포도원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분의 권위를 거절하면, 우리는 결국 그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농부가 될 것이고, 그 돌에 부딪혀 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 머릿돌 위에 우리 삶을 세운다면, 우리는 영원한 나라의 일꾼으로, 기쁨의 수확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분의 권위를 거절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 안에 나의 존재 전체를 맡기며 사는 신뢰의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그 머릿돌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그 돌이 나를 부수기 전에, 나는 그 돌 위에 나를 낮춰야 합니다. 거기서 참된 생명이 시작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
오늘, 주님의 권위 앞에 다시 무릎 꿇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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