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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37-39 묵상,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bibletopics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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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아래의 사랑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도 말없이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고통의 절정이 아니라, 사랑의 절규가 들리는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할 마태복음 23장 37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으로 부르짖으신, 절망과 애통이 담긴 사랑의 외침입니다.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코앞에 두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가슴 아프게 외치신 이유는 단 하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 23:37)

예수님은 반복하여 부르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 23:37) 이 반복된 부름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울음을 억누르며 부르는 소리와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깃든 땅이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던 성전이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선지자들을 거절했고, 때로는 죽였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까지 거절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단지 도시를 향한 부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향한 간절한 호소입니다.

고난주간의 이 장면은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우리에게 던집니다. 십자가는 정죄의 도구이기 전에, 구원의 손짓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박한 사랑이, 인간의 완고한 거절 앞에서 흘러내리는 자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의 부름에 응답하고 있느냐?”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마 23:37)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 23:37).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암탉에 비유하십니다. 날카로운 발톱도, 강한 날갯짓도 없는 암탉. 그러나 그 품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새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 장면은 고난주간의 영적 해석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새끼를 위해 스스로를 열어젖히는 암탉처럼, 팔을 벌리십니다. 날개는 못에 박히고, 심장은 찢기고, 육체는 상하여도, 그 안에서 우리는 보호받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 날개 아래를 피하여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죄성이며,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그분은 날개를 펴셨고, 우리는 그 품을 피했습니다. 고난주간은 그 품을 다시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7)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선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자유의지가 얼마나 비극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말씀하셨고, 품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외면했고, 도망쳤습니다. 사랑은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언제나 인간의 거절 속에서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은 이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품을 외면하지 않았는가? 날마다 들려온 부름에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선지자의 음성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닫아버리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고난주간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꿰뚫는 칼날과도 같습니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 23:38-39)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8).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이 말씀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도성, 더 이상 영광이 머무르지 않는 장소가 되어버린 예루살렘의 운명을 말하는 동시에, 메시아를 향한 마지막 초대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환영하기 전까지, 그들은 메시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소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찬송의 고백,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은 그 약속을 다시 붙드는 시간입니다. 황폐해진 심령도, 주님을 부르면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가장 깊은 울음, 가장 뜨거운 사랑, 가장 아픈 거절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 애끓는 외침 속에 우리 이름이 들리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여전히 날개를 펴고 계십니다. 외면당한 날개, 못 박힌 날개, 찢긴 심장을 안고도 여전히 부르십니다. “내 품으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품겠다.”

고난주간은 그 품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날개 아래로 걸어들어가는 용기의 시간입니다. 사랑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기다림에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이제는 피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펼치신 날개 아래, 제가 돌아갑니다. 그 품이 제 집이며, 제 구원이요, 제 안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날개 아래서 다시 숨을 쉬게 되는 복된 고난주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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