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3:16-22 묵상, 맹인된 인도자들이여
맹인의 맹도(盲導), 성소를 잃은 신앙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을 걸어가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깊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난주간은 그저 슬픔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3장 16절부터 22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허상을 꿰뚫어 보시며 외치신 세 번째 화(禍)의 선언입니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맹인된 인도자들'이라 일컬으며, 외형적 경건과 본질을 뒤바꾼 그들의 위선을 조목조목 지적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참된 성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성소를 향한 삶의 중심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맹인된 인도자들이여 (마 23:16)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이렇게 부르십니다.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여!"(마 23:16) 이 표현은 단순한 욕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현실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단입니다. 인도자의 역할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도자가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가 이끄는 무리는 결국 낭떠러지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맹세에 대해 가르치며,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하지만 성전으로 맹세하면 상관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외형은 강조하면서도, 본질은 잊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맹인'이라 부르십니다.
고난주간에 이 말씀이 왜 중요한가 하면, 주님은 지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계십니다. 참 성전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을 통해 새로운 성소가 세워질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붙들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껍데기만 붙들고 본질을 버린 모습을 보시며 안타까움과 진노가 함께 솟구치신 것입니다.
외형과 본질의 전도된 신앙 (마 23:17-18)
그들은 말합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마 23:16). 또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마 23:18).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맹인들이여! 무엇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 23:17)
여기에는 신앙의 왜곡된 질서가 드러납니다. 거룩을 만드는 근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가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성전의 금이 거룩한 것은 성전이 있기 때문이고, 제단 위의 예물이 의미 있는 것은 제단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과 재물에 눈이 멀어, 영적 질서를 거꾸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소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십자가 없는 예배, 순종 없는 기도, 사랑 없는 섬김—이 모든 것은 제단은 있으나 불이 없는 신앙과도 같습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참 성전이 되셔서 우리 안에 다시 성소를 세우시는 시간입니다. 그 중심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전을 말하면서도 성전 밖에 서 있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맹세의 본질 (마 23:19-20)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맹인들이여! 무엇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맹세함이요"(마 23:19-20)
이 말씀은 단순한 율법 해석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을 회복시키는 선언입니다.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입니다. 예물은 그 임재 앞에 드려지는 응답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점점 재물과 조건, 효능과 효율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 무질서를 다시 세우고자 하십니다. 고난주간, 그분은 스스로 예물이 되십니다. 제단 위에 올라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를 다시금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계시며, 그분은 우리를 성전 되게 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십니다.
맹세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 (마 23:21-22)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 23:21-22)
맹세란 단순한 말의 포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전 존재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방향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향한 상징이었고, 제단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들은 그 상징을 말하면서도,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고난주간은 방향을 묻는 시간입니다.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향하고 있는가? 나의 예배는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나의 섬김과 나의 언약은 외형만이 아니라 본질을 담고 있는가?
십자가는 그 모든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성소가 되셨고, 제물이 되셨고, 인도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맹목적인 맹세가 아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방향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의 흐름 속에서 예수님의 탄식 어린 세 번째 '화' 선언입니다. 그것은 헛된 맹세의 무게가 아니라, 본질을 잃은 신앙의 공허함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성소를 세우기 위한 주님의 단호한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외형인가, 본질인가? 제물인가, 제단인가? 제단인가,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이신가?
고난주간은 잃어버린 중심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되지 말아라. 참 성소는 너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의 신앙이 본질을 따라가게 하소서.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성소의 금이 아니라, 성소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참 성소를 회복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오늘도 그 길에 함께 동행하며, 거룩한 제단 앞에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는 복된 고난주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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