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3:13-15 묵상, 서기관 바리새인을 향한 저주
문을 닫는 자들, 길을 잃은 인도자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의 중턱에 이르면 우리는 주님의 언어가 점점 더 분명하고 단호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비유로 돌려 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시간이고, 돌이킬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기에, 말씀은 날이 서고 무게는 깊어집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선언하신 '화 있을진저'라는 일곱 가지 화 중 그 첫 두 가지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닫아버린 자들에 대한 탄식과, 영혼을 잘못 인도하는 자들에 대한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주간,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의 심장을 따라, 우리도 이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며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닫힌 문 앞에 선 예수님의 탄식 (마 23:13)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이 말씀은 단순한 질책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식하시는 울부짖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르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 문을 여는 자들이 아니라 닫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안내해야 합니다. 교회란 천국 문을 향한 안내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문이 지식과 권위로 가로막히고, 사람의 율법과 전통으로 덧씌워질 때, 진리는 흐려지고 생명은 가려집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길 위에서, 문을 여시려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문 앞에서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는 모습을 보며 탄식하십니다. 고난주간은 주님의 이 탄식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천국 문을 열고 있는가, 아니면 가리고 있는가. 내 삶은 복음의 길을 밝혀주는가, 혹은 흐리게 하는가.
회심이 아니라 파멸을 만드는 열심 (마 23:15)
예수님은 이어서 또다시 외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종교적 열정을 문제 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열심은 있지만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만큼 열정적으로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자신들의 외식된 신앙과 왜곡된 가르침으로 그들을 더 멀리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열심도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의 길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발걸음과 방향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것이며, 회개는 율법의 굴레가 아니라 은혜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잘못된 인도자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마지막까지 외치셨습니다. 이 화는 저주가 아니라, 경고요, 동시에 초청입니다. 돌이키라는 외침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심판이기 전에 먼저 자비의 부르심입니다.
길을 잃은 인도자, 오히려 방해가 된 자들 (본문 전체의 통찰)
본문 속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인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외식된 모습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천국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쇠가 지금 눈앞에 계신데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종교적 틀 안에 갇혀 그 문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방해합니다. 그리고 열심을 내어 개종자를 만들지만, 참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종교적 구속으로 묶어버립니다. 이들은 영혼의 목자가 아니라, 영혼을 얽어매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은 이 장벽을 부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나아가신 시간입니다. 그분은 다시 열기 위해 오셨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기고, 거짓된 종교의 틀을 깨뜨리시고, 하나님께 이르는 참된 길을 밝히기 위해 오셨습니다.
고난주간의 이 외침을 들을 귀 (묵상의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이 단호한 외침은 단지 과거의 책망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 사역과, 우리 삶에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나는 문을 여는 자입니까, 아니면 가리는 자입니까? 나는 누군가를 복음으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종교적 틀에 가두고 있습니까? 나의 열심은 복음의 본질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방식과 자의적 정의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고난주간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멈춰 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눈물어린 외침을 다시 듣는 시간입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이 말씀은 정죄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경고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문 앞에 서 계십니다. 문을 닫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 다시 천국 문을 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빛을 가리지 않고, 더욱 밝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장벽으로 삼지 않고, 다리로 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의 끝에서,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문을 여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과 외침 속에서 고난주간의 심장을 들었습니다. 복음은 열린 문이고, 우리는 그 문을 향한 안내자들입니다. 결코 문을 가로막는 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고난주간은 진리를 되살리는 시간입니다. 거짓된 열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시간입니다. 열심보다 방향을, 권위보다 진심을, 형식보다 생명을 붙드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는 누구에게 길이 되고 있느냐? 너는 지금 어느 문 앞에 서 있느냐?
우리 모두 주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여, 저의 발걸음이 누군가에게 천국을 향한 길이 되게 하소서. 복음을 닫는 입술이 아니라, 열어주는 삶을 살게 하소서. 문이신 주님과 함께, 오늘도 다시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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