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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요 13:5, 허리를 동이고 무릎을 꿇다

bibletopics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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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을 두르신 주님의 사랑

고난주간의 어둠이 깊어가는 밤, 예수님은 조용히 식탁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5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이 장면은 단순한 친절의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신 주께서 종의 자리로 내려오신 사건이며, 십자가의 사랑을 예고하는 깊은 상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발 씻음 앞에서, 복음의 본질과 제자의 길을 다시 묵상해야 합니다.

허리를 동이고 무릎을 꿇다

예수님은 만찬 도중에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는 행위였고, 수건을 두른다는 것은 종의 복장을 갖춘 것입니다. 여기서 ‘두르다’는 말은 헬라어 ‘διαζώννυμι diazōnnumi’인데, 이는 허리에 단단히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이 일할 준비를 할 때 허리에 띠를 두르듯이, 예수님은 철저히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발을 씻는 일은 가장 낮은 종의 몫이었습니다. 길이 흙먼지로 가득하고, 샌들로 걷던 제자들의 발은 더러웠고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발을 망설임 없이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분이 단 한 사람도 제외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그리고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더러움을 손으로 받아내셨습니다. 발이라는 신체는 상징적으로 ‘삶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길, 그들의 흔적, 그들의 고집과 무지를 모두 손으로 받아내신 것입니다. 씻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 정결만이 아니라, 내면의 회복과 새로운 길을 향한 초대였습니다. 주님은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의 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말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침묵 속에서 예수님은 물을 떠서 발에 붓고, 손으로 닦으시고, 수건으로 말없이 감싸셨습니다. 이 침묵은 책망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무거운 침묵 속에 주님의 눈물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왕이, 자기 제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단 말입니까? 이 사랑은 상식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유다의 발도 씻으신 사랑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장면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발도 씻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했고, 본문 2절에서는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도 그의 발을 씻기십니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적어도 그를 제외할 수도 있었고, 책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서 ‘끝까지’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εἰς τέλος eis telos’로, ‘완전하게, 철저하게, 마지막까지’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고, 계산이 없었습니다. 유다가 회개할 가능성을 완전히 버리시기 전까지, 주님은 그를 품고자 하셨습니다.

이 사랑 앞에서 우리는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발을 씻겨줄 수 있을까요? 나를 배신한 자, 나를 조롱한 자, 나를 모른 척한 자의 발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습니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13:15)

이 발 씻김은 구속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단지 더러운 것을 닦아주는 행위가 아니라, 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삶을 씻어내는 구속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야의 물을 통해 십자가의 피를 예표하셨고, 수건을 통해 자신의 의를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은 죄인된 우리가 받은 은혜의 시작이며, 거룩한 삶으로 부름받은 존재로의 전환점입니다.

다시 허리를 동이고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은 발을 씻기신 후 다시 겉옷을 입으시고 자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 13:12) 주님은 행동을 통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통해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충격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충격 속에서 진정한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는 자리에서 입증됩니다. 섬김은 역할이 아니라 태도이며, 직분이 아니라 삶의 자세입니다. 교회는 말로 사랑을 외치는 공동체가 아니라, 수건을 들고 세상의 발 앞에 무릎 꿇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이 수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허리에 두르셨던 그 수건은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사명의 상징입니다. 겉옷을 벗고, 물을 떠서,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아내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영성을 배웁니다. 그것은 권리가 아닌 비움이며, 주장보다 헌신이며, 이김보다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다시 허리를 동이고, 겉옷을 벗고, 섬김의 수건을 두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더러운 발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자가 아니라, 그 발을 먼저 손으로 감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 받은 사랑의 방식이며, 주님이 보여주신 제자의 길입니다.

결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이 짧은 구절 속에 복음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꿇으시며, 침묵 속에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이 흘렀고, 심지어 배신자에게도 미쳤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수건을 들고 서야 합니다. 손에 십자가를 들기 전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는 사랑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제자이며, 진짜 교회이며, 진짜 복음입니다.

주님, 내 손에 다시 수건을 들게 하소서. 섬김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무릎 꿇기를 주저하지 않게 하소서. 유다의 발도 씻기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나도 그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그럴 때, 교회는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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