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마 26:26, 마지막 만찬이 갖는 의미
떡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시다
고난주간의 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떡을 들어 감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 26:26) 그날 밤은 어둠이 짙었고,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웠지만, 주님은 조용히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고, 단지 유대 절기를 지키는 형식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약속이었고, 하나의 사랑의 유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고난주간의 깊은 뜻과 복음의 본질을 다시 마주해야 합니다.
떡을 떼시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여기서 ‘떡’은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하는 무교병이었을 것입니다. 누룩이 없는 빵, 곧 부풀지 않은 순수한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떡입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종종 죄나 부패를 상징하기에, 이 무교병은 죄 없으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기에 적절합니다.
‘떼어 주셨다’는 표현은 헬라어 ‘κλάω klaō’로, 물리적으로 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찢기고 나누어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감싸 안으시며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찢어진 빵은 곧 찢어질 몸이었고, 나누어진 떡은 곧 나누어질 은혜였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식탁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드려지는 제물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시는 대제사장이셨고, 동시에 그 제물 자체이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떡을 떼는 이 행위 안에는 십자가가 미리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떡을 얼마나 자주 형식으로만 받아왔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찬의 떡은 한 조각의 밀가루가 아닙니다. 그것은 찢기신 주님의 살이며, 나를 살리기 위해 부서지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을 지나, 실제로 그분의 희생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익숙해져 그 깊이를 놓치고 맙니다. 축복 없는 손으로, 회개 없는 마음으로 떡을 받을 때, 우리는 주님의 상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받아서 먹으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받아서 먹으라.” 여기에는 두 가지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받다’는 것은 선물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먹다’는 것은 그 선물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신앙은 듣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랍니다.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화는 없습니다. 복음을 알아도 내 안에 삼키지 않으면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초대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나누시며, 그것을 억지로 밀어 넣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손에 떡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스스로 받아야 하는 신앙입니다. 강요된 신앙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믿음만이 끝까지 갑니다.
이 ‘먹는다’는 표현은 유대인의 식탁 문화에서는 단순한 영양 섭취를 넘어서, 교제와 일치를 의미합니다. 함께 먹는다는 것은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떡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분과 하나 되는 언약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이 참여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삶을 내어드리는 전인격적인 헌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초대 앞에 냉담합니다. 신앙의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딴 데 가 있고, 영혼은 굶주린 채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상 앞에서, 가룟 유다는 떡을 받았으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듯이, 우리도 손은 내밀되 마음은 닫고 있지는 않습니까? 떡을 손에 들었다고 해서,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받되, 마음으로 받고, 먹되, 믿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여기서 ‘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σῶμά sōma’이며, 육체적 실체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이 상징이 아니라 실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몸이 실제로 찢기고 피 흘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셨습니다. 이 떡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라, 내어주신 몸의 표징이며, 나눠주신 사랑의 실체입니다.
십자가의 몸은 단지 상처 입은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진 몸이었습니다. 그분의 살은 정죄받은 우리의 죄를 대신한 속죄제였고, 그 찢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잇기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그 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형체가 없이 찢긴 그 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그 몸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떡 앞에서 결코 가볍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몸을 기억하지 않는 성찬은, 아무리 거룩한 형식이라 해도 죽은 예식일 뿐입니다. 고난주간, 우리가 마주할 십자가의 몸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너를 위해 준 것이다.”
그 음성을 듣고도 떡을 흘리며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그 몸을 받고도 감격 없이 돌아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깊이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그 몸을 품은 자로서, 다시 그 사랑을 살아내야 합니다.
결론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유월절 식사 자리가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초청장이었습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떼어주심으로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그 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손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삼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 떡이 생명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받아서 먹으라.” 오늘 우리는 그 초청 앞에서 다시 엎드려야 합니다. 떡을 들며 결단하고, 그분의 몸을 바라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의 성찬은 단지 기억의 의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주님, 이 떡을 먹으며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이 찢기신 그 몸 안에서, 나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다시 고백합니다. 이제는 그 몸을 받은 자로 살게 하소서. 사랑으로 떡을 떼셨던 주님처럼, 나도 사랑으로 나누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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