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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막 14:10-11, 악들의 연합 하지만

bibletopics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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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스승, 연합된 어둠

고난주간의 무게는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사랑했던 이들의 배신에서, 진리를 입에 담는 자들의 교활한 계산에서 비롯됩니다. 마가복음 14장 10-1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에 결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매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짧은 이 구절은 가장 깊은 배신과 가장 교활한 공모의 정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유다의 가벼운 마음과 종교 지도자들의 무거운 음모를 동시에 마주하게 됩니다.

가벼운 영혼, 무거운 죄의 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열둘 중 하나였습니다. 공생애 내내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말씀을 들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승을 팔기로 작정합니다. 마가는 유다가 먼저 대제사장들에게 갔다고 기록합니다. 그 주도권은 유다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여기서 ‘넘겨주다’는 말은 헬라어로 ‘παραδίδωμι paradidōmi’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인도하다를 넘어 배신하다, 포기하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단지 스승을 넘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버린 것이고, 영혼을 내어준 것이었습니다.

왜 유다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신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실망감, 탐욕, 사탄의 영향. 요한복음은 그가 도둑이었다고 말하며(요 12:6), 누가는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증언합니다(눅 22:3).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중심이 비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중의 일부였고, 무리의 중심에 있었지만,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제자였지만, 속은 이미 팔려 있었습니다. 중심이 없으면, 그 자리는 언제나 다른 것이 채웁니다. 욕심, 불만, 회의, 타협. 그것들은 조용히 신앙의 자리를 잠식합니다. 유다는 마지막 만찬까지 아무런 표정 없이 참석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지도 못했습니다. 유다는 누구보다 평범해 보였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진리는, 중심이 무너진 순간, 가장 먼저 배신당합니다.

오늘 우리의 중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고난주간, 우리는 유다를 보며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겉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중심의 문제입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믿었는가보다, 지금 내 마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중심 없는 제자는 결국 기회만 찾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 자신이 계산한 이득, 자신의 관점으로 믿음을 이용하려 할 때, 이미 스승을 팔 준비는 끝난 것입니다.

 

교활한 종교, 기뻐하는 악

마가는 유다의 방문을 받은 대제사장들이 ‘기뻐했다’고 기록합니다. 단어의 선택이 섬뜩합니다. ‘기뻐하다’는 헬라어 ‘χαίρω chairō’는 일반적으로 기쁜 일이 있을 때 쓰이는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기쁨이 거짓과 교만, 악한 공모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왜곡된 어둠으로 느껴집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을 때, 제자가 찾아와 스스로 넘기겠다고 하자, 그들의 계획은 현실로 다가왔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이 기쁨은 사탄의 기쁨이었습니다. 정의가 뒤틀리고, 거룩이 희롱당하고, 진리가 팔려나가는 그 순간, 종교라는 외피 속에서 악은 웃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교회와 종교가 진리를 버리고 권력과 손을 잡을 때 얼마나 교활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의 수호자였고,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죄를 사하는 직무를 감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돈을 주고, 무죄한 이를 잡아 넘기려는 음모를 짜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예수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손을 빌렸고, 나중에는 빌라도의 손을 이용합니다. 책임은 나누고, 손은 씻되, 결과는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이 되도록 계산했습니다. 이 얼마나 교묘한 신앙입니까? 오늘날도 교회와 지도자들이 비슷한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진리를 정면으로 대적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고, 불의를 방관하며, 때론 공모합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이 기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동참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오면 ‘하나님의 인도’라 말하는 신앙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의 탈을 쓴 탐욕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를 가장 철저히 고발하셨고, 결국 그 고발의 대가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악의 연합, 그리고 하나님의 길

유다와 대제사장들은 원래 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연합합니다. 공통의 목표, 곧 예수를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종종 이러한 ‘악의 연합’을 보여줍니다. 헤롯과 빌라도도 서로 원수였지만, 예수님의 재판 앞에서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눅 23:12). 빛을 대적하는 어둠은 언제나 연합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예수를 따르려는 결단 앞에는 다양한 방식의 연합된 유혹이 다가옵니다. 타협하라, 무시하라, 밀어두라, 나중에 하라. 이 모든 음성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뭉쳐집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다처럼 만들려 합니다. 조용히, 그리고 치밀하게.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어둠의 연합을 알고 계셨고, 그 모든 음모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악의 연합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유다의 배신, 대제사장들의 음모, 빌라도의 외면, 군중의 조롱,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활함 위에 서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배신당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가십니다. 그리고 그 끝은 무덤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이것이 고난주간을 관통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결론

마가복음 14장 10-11절은 단지 한 사람의 배신과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기쁨을 기록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심이 없는 제자, 거짓된 종교, 계산된 연합이 어떻게 진리를 찌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악한 공모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는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나는 스승을 팔 기회를 찾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악의 연합 앞에서 침묵하거나, 동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중심은 정말 주님을 향해 견고히 세워져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서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중심을 지키는 제자가 되자. 어둠 속에서도 진리를 따르자. 계산이 아닌 순종, 침묵이 아닌 고백, 타협이 아닌 거룩으로 이 한 주를 채워가자.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유다처럼 묻지 않게 하소서. “내가 예수를 넘기면, 무엇을 주시겠나이까?” 그 대신 이렇게 고백하게 하소서. “주여, 무엇을 드리면 좋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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