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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마 26:14-15, 배신자 유다의 거래

bibletopics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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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삼십의 거래, 잃어버린 영혼의 무게

고난주간의 흐름 속에서 유난히 무거운 발걸음을 남기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가룟 유다입니다. 제자였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했으며, 수많은 이적과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팔기로 결정합니다. 마태복음 26장 14-15절은 그 치명적인 선택의 순간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이 짧은 구절은 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를 정죄하며 멀리할 수 없습니다. 유다는 곧 우리 자신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에 넘길 수 있는가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가 스스로 예수님을 팔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여기서 ‘넘겨주다’는 헬라어 ‘παραδίδωμι paradidōmi’는 단순한 인도함이 아니라, 배신과 배반의 의미를 포함한 단어입니다. 유다는 단지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 대가는 은 삼십. 당시 노예 하나의 값 정도였습니다. 구약 스가랴서 11장 12절에서도 동일한 금액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팔았을 때, 백성들은 그분의 가치를 은 삼십으로 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은 삼십은 경멸의 상징이자, 무시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가치를 세상 가격으로 환산했고, 결국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값이 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단지 유다의 선택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대속의 어린 양으로 준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장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인간의 이익과 교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탐욕과 타락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은 삼십은 단지 유다의 욕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을 되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는 예수를 얼마에 넘기겠느냐?"

조용히 일어난 거래

유다는 제자들 중 가장 조용한 자였습니다. 그는 대단한 외침이나 행동 없이 늘 무리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계 역할을 맡고 있었고, 요한복음은 그가 돈을 도둑질했다고 말합니다. (요 12:6) 겉으로는 충직해 보였지만, 속에서는 이미 금전적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서히,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깊어집니다.

유다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주님을 판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예수님과 함께 손을 담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누구도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그는 아무 문제 없는 제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점입니다. 진정한 배신은 가장 가까운 자로부터, 가장 조용히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조용히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 앞에서 양심이 찔릴 때, 변명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다는 성전에 드리는 돈을 관리했고, 사람들 앞에서 경건한 척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이미 무너져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틈은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 주님을 배반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유다의 계획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막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유다가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끝까지 기회를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 말씀은 유다를 노골적으로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두드리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길을 꺾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무능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유다를 끝까지 품으려는 하나님의 인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서 하나님의 인내는 때로 거절당합니다. 은혜는 강요가 아닙니다. 은혜는 손 내미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 손을 뿌리쳤고, 은 삼십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 앞에서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고통을 지고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십자가로 가는 길에 포함된 어두운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신비입니다. 인간의 악도 하나님의 손에서 구원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다의 책임을 면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

고난주간,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 고난의 길목마다 사람들의 배신과 무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부인했고, 유다는 팔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유다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삶의 어떤 자리에서는 그분을 은 삼십에 넘기고 있지는 않은지요. 자신의 자존심, 이익, 편안함, 혹은 세상의 인정 앞에서 주님의 진리를 팔아버리는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은 삼십은 숫자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얼마에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상징입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그 어리석음을 끊어야 합니다. 유다처럼 주님을 외면하는 대신, 마리아처럼 향유를 쏟아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마음의 거래소 앞에 서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과 주님을 바꾸려 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다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팔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해야 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은 삼십의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내 삶의 중심에 다시 주님을 모시게 하소서.” 그 고백이 있는 곳에, 진짜 제자의 길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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