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난주간 묵상, 마 21:5 슥 9:9 나귀타신 왕

bibletopics 2025. 3. 26.
반응형

나귀를 타신 왕, 뒤바뀐 영광

예루살렘 거리마다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신들의 겉옷을 길가에 깔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지만 그 열광의 중심에는 화려한 군마나 갑옷을 입은 장수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고난주간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영광이 아닌 겸손으로, 정복이 아닌 순종으로 오신 그분을 오늘 우리는 묵상하려고 합니다.

나귀를 타신 이유

마태복음 21장 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이만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직접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의 이 예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에게 주어진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외세의 억압과 절망 가운데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왕이 임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말이 아닌 나귀를 탑니다. 히브리어로 '나귀'는 'חֲמוֹר chamor'이며, 이는 종종 농사일이나 짐 운반에 쓰이는 짐승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왕이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말이 아닌 나귀를 타셨을까요? 그것은 그분이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정치적 구원자가 아니라, 죄인을 위한 대속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화려한 무장을 하지 않았고, 군중을 이끌 혁명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이 묘사하는 고난받는 종처럼, 조용히, 그리고 겸손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왕이지만 종처럼

본문에서 주목할 단어는 '겸손하여서'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πραΰς praus'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외적인 온순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는 자기 부인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2장 6-8절이 말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사람의 어깨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사람의 발을 씻기시는 왕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섬김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통치가 아닌 희생이었고, 다스림이 아닌 내려옴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의 이 겸손한 왕권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교회는 그분의 몸이라 부르면서도, 때로는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도자는 권위를 내세우고, 신자는 복을 얻기 위한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뒤엎으셨습니다. 나귀를 타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꿈꾸는 종교의 틀은 송두리째 흔들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린 자꾸 고치지 않고 자기를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나자지심을 배우지 못한 채, 그분의 이름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본문의 비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군마를 타고 온 예수님을 만들어 따르고 있는가.

뒤바뀐 영광의 길

군중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 외침은 뜨거웠고, 거리에는 흥분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그 외침의 본질은 기대의 투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꿈에 맞추어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외면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의 외침에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며칠 뒤 그는 고요히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십니다. 그 길은 환호에서 저주로, 찬양에서 조롱으로 바뀌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그의 뜻은 우리의 뜻보다 높습니다.

고난주간의 첫날, 우리는 이 뒤바뀐 영광의 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왕권은 철권이 아닌 은혜였고, 높아짐이 아닌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이기기 위해 칼을 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때론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하다가 본질을 놓칩니다. 신앙이 복잡해지고, 단순한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나귀를 타신 그분의 모습은 우리에게 다시 단순함과 본질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히 오시는 주를 맞이하되, 내 뜻이 아닌 그의 뜻을 따라 걷기를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결론

고난주간은 한 왕의 길을 따라가는 시간입니다. 그 왕은 말이 아닌 나귀를 타셨고, 권세가 아닌 겸손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외면적인 승리가 아닌, 내면의 복종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바라보며, 신앙의 본질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나귀를 타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 겸손은 우리에게 부담이 되고, 그 은혜는 거절당한 채 남게 됩니다. 이 고난주간, 우리의 왕을 다시 맞이합시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기억하며, 나도 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겠노라 고백합시다.

그리고 삶 속에서 그 겸손을 실천합시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방식이 아닌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아갑시다. 나귀를 타신 왕, 그분의 행렬에 조용히, 그러나 결단하며 동참합시다. 그러할 때, 그분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