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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15 - 18:30 묵상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

bibletopics 202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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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채워지는 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크다고 여기는 것을 작다 하시고, 우리가 작게 여기는 것을 귀하다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누가복음 18장 15절부터 30절까지의 본문도 그런 말씀입니다.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중심을 꿰뚫고 계시며, 겉으로 보기에 강한 자가 아닌, 오히려 약한 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은 어린아이와 한 관원의 이야기, 그리고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자의 조건이 무엇인지, 영적 순례길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깊이 들여다보게 합니다.

어린아이의 자리(눅 18:15-17)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기들도 예수께 데리고 오는 장면은 마치 순수함이 주님을 향해 손을 뻗는 그림 같습니다 (눅 18:15). 하지만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어른의 세계는 언제나 분주하고, 질서 있고, 실용적이어야 하니까요. 어린아이는 연약하고, 느리고, 어수선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질서를 거꾸로 뒤집으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6).

주님은 단순히 아이를 귀여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이가 가진 내면의 구조를 보신 겁니다. 의존함, 수용함,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비워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상태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성숙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지만,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이란 오히려 ‘되돌아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눅 18:17). 이 말씀은 단호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심령, 즉 하늘을 향해 아무 계산 없이 손을 드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품을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한 관원의 질문(눅 18:18-21)

그 다음 등장하는 인물은 한 관리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8:18) 이 질문은 외면상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전제된 자기 확신이 있습니다. 그는 뭔가를 해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여야’라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말 속에 감춰진 교만을 먼저 드러내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 18:19). 예수님은 선에 대한 정의를 하나님께로 돌리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계명을 언급하시지요. 이 관원은 곧바로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 (눅 18:21). 얼마나 자신감 넘치는 대답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빈틈을 아십니다. 그의 삶은 계명을 지키는 외적 윤리로는 채워졌지만, 내면은 자기 소유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내려놓음의 초대(눅 18:22-25)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18:22). 이 구절은 마치 단검처럼 날카롭습니다. 주님은 관원의 삶 속에 있는 가장 중심적인 우상을 찌르십니다. 그것은 바로 ‘소유’였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물이 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심히 근심하더라”는 말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지금 진리와 대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눅 18: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눅 18:24). 그리고 이어서 극단적인 비유를 드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눅 18:25). 여기서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 가장 작고 미세한 통로를 의미합니다. 낙타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짐승이었습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말씀하십니다. 즉, 자기 소유에 묶인 자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기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버림과 얻음의 역설(눅 18:26-30)

제자들은 이 말씀에 놀라며 묻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26).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이 구절은 복음의 정수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묻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눅 18:28). 여기서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눅 18:30).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버린 것을 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비운 그 자리에, 더 깊고 넓은 하늘의 충만함으로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이 세상의 원리와 반대입니다. 세상은 움켜쥐라고 하지만, 주님은 놓으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채우라고 하지만, 주님은 비우라고 하십니다. 이 역설의 원리는 구속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린아이의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관원처럼 여전히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자기 소유와 자격을 쥔 채 주님께 다가가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비워야 채워지는 곳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빈손을 든 자가 하늘을 얻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그저 ‘예’라고 대답하는 자에게 그 나라는 열립니다. 우리도 주님의 초대에 응답합시다. 비우고 따릅시다. 내려놓고 나아갑시다. 그 길의 끝에 하늘의 보화, 곧 영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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