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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1-14 묵상, 세리의 기도 바래새인의 기도

bibletopics 202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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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짜낸 기도, 침묵으로 흘린 자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기도합니까? 그 기도가 우리의 심장소리를 품고 있는지, 아니면 관습처럼 굴러가는 말의 습관인지는 돌아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기도가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삶'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진정한 동행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겉으로 드러난 형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장을 따라 걸어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 한 여인의 간청과 한 죄인의 탄식이 이 말씀의 몸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귀를 기울일 때, 기도란 말의 합이 아니라 마음의 무게임을 알게 됩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가련한 과부(눅 18:1-5)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눅 18:1)라고 시작하는 본문은, 단순히 ‘끈질긴 기도’의 교훈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성도의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한 과부를 등장시킵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정의의 상징이어야 할 자가, 정의를 방기한 채 냉소와 무관심의 껍질 속에 갇혀 있지요. 그러나 이 불의한 재판장을 끝내 움직인 것은, 과부의 끊임없는 요청이었습니다.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라는 외침은, 단순한 억울함의 토로가 아니라,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진실 하나 붙들고 살아가려는 영혼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눅 18:3).

과부는 성경에서 약자 중의 약자입니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사회적 지위도, 힘 있는 후견인도 없습니다. 그녀는 순전히 ‘자신의 말’만으로 싸우는 자입니다. 오늘날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 역시 그녀와 비슷한 처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눈물뿐이고, 하늘을 향한 한 마디의 신음뿐일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눅 18:7).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적인 진리를 만납니다. 기도의 능력은 ‘힘’이 아니라 ‘무력함’에서 나옵니다. 기도는 자신의 의지나 열정에서 뿜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망가진 심령이 드리는 항복의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이 과부의 기도는, 세상의 논리로는 보잘것없고 무모해 보일지 몰라도, 하늘의 법정에서는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외침이 됩니다.

하늘 법정의 정의(눅 18:6-8)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7) 그리고 바로 이어서,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고 단언하십니다 (눅 18:8).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 이 말씀은 단순한 종말론적 선언이 아니라, 기도라는 믿음의 행위가 마지막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기관이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를 놓치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기도를 잊고 살아갑니까. 성도 여러분, 정의는 법정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 속을 걷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 순례길의 발자국이며, 하나님의 때를 향해 무릎 꿇은 기다림입니다. 기도는 신속한 응답을 요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밀착을 만들어가는 숨결입니다. 그 숨결은 낙심 속에서도, 지체됨 속에서도, 버림받은 듯한 절망 속에서도 계속됩니다. 기도는 ‘지연’의 언어로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성취’의 확신으로 응답됩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와 자기를 낮추는 자(눅 18:9-12)

이어서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드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성전 앞 계단에서 시작된 드라마 같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두 사람의 정체성을 낱낱이 드러내지요. 바리새인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며, 자신이 어떤 의로운 행위를 했는지를 줄줄이 나열합니다 (눅 18:11-12). 그는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박수치고 있는 셈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자기 의’의 무서운 함정을 봅니다. 기도가 자기 자신을 빛내는 무대가 될 때, 성전은 더 이상 은혜의 장소가 아니라 자기 자랑의 전시장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기도는 소음일 뿐입니다. 그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거리가 멉니다. 그는 ‘기도’의 형식을 빌려 ‘비판’의 본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앞에 선 타인을 낮추고, 자기를 높이는 이 기도는 결국 하늘 문을 닫고 맙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자의 자백(눅 18:13-14)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3). 이 기도는 한 줄뿐입니다. 설명도 없고, 합당한 이유도 없으며, 변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 줄 속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절박한 영혼이 드리는 고백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하나님의 손이 머무는 이유는, 바로 이 ‘자백’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눅 18:14). 이 선언은 당시 청중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완벽하다고 여겨진 자가 의롭지 못하고, 멸시받던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니요.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논리입니다. 복음은 자랑하는 자를 부수고, 무너진 자를 일으킵니다. 높아지려는 자를 낮추고, 낮아진 자를 높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역설이며, 구속사의 길입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과부처럼 외롭고 지친 부르짖음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형식에 갇힌 자기 확신입니까? 아니면 세리처럼 이름조차 내세우지 못하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오직 자비만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두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에 서 있느냐?” “네 기도는 나를 향하고 있느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특별한 기술이나 거창한 결단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작은 언제나 ‘가슴을 치는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아무 말 없이, 눈물로, 탄식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속히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 자신을 내어맡기는 연습입니다. 그 연습 속에서 우리는 점점 주님과 같은 걸음을 걷게 됩니다. 정의가 무너지고, 사랑이 식어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화려한 예배가 아니라 진실한 기도입니다. 무릎 꿇은 한 사람의 눈물이 천군천사의 침묵보다 더 큰 소리를 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는 세리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낙심하지 말고,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로 다시 일어납시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한 마디에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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