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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40절,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bibletopics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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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장 40절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 중 가장 핵심적이며 결정적인 선언 중 하나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이 말씀은 단순히 한 개인의 신앙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뜻과 구속사적 경륜,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부활의 영광을 담고 있는 교리적 진술입니다. 부활 주일에 우리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로 이어지는지, 믿음이 어떻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지, 그리고 부활이 단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소망이며 능력으로 작용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뜻, 현재의 생명, 장래의 부활이라는 세 가지 교리적 주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대적 진리와 영원한 소망을 동시에 선물합니다.

하나님의 뜻, 생명의 주권적 선언

본문은 하나님의 뜻에서 시작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이라는 구절은 모든 구원의 출발점이 인간의 행위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의지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뜻’은 헬라어로 ‘토 셀레마(τὸ θέλημα)’로, 단순한 바람이나 기대가 아닌, 반드시 성취되는 결정된 의지,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혼란이나 무질서 속에서 인간의 구원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예정된 경륜 속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으며,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이 있습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이 전 인류를 향해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보다’는 헬라어로 ‘테오레오(θεωρέω)’로, 단순히 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바라보며 깨닫고 인식하는 영적 통찰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나 윤리적 선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의 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믿는다’는 단어 역시 중요합니다. 헬라어 ‘피스튜오(πιστεύω)’는 신뢰하고 의탁하며 순종하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동의나 감정적 동요가 아니라, 전인격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의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단지 아들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가는 모든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인간의 결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주어지는 은혜이며, 이는 오직 믿음을 통해 개인에게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행하고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자신이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의 완성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은 결국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며, 그 결과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영생, 지금 여기에 시작된 생명의 실재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생’은 헬라어 ‘조에 아이오니오스(ζωὴ αἰώνιος)’로, 단순히 시간적으로 끝이 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속에서 누리는 질적이고 충만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는 실제이며, 성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거룩한 생명의 역동성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아는 행위는 정보나 지식 습득을 넘어, 관계적 친밀성과 체험적 교제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더 이상 자신 중심적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통치 아래 사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영생은 또한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구원의 결과입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생명에 대한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다니엘 12장 2절은 "많은 사람이 티끌 가운데서 깨어나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예언은 단순한 미래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현재 신자에게 실현된 축복이며 동시에 장래에 완전하게 성취될 약속입니다.

영생은 믿는 자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와 열매를 요구합니다. 이는 단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 말씀, 사랑, 섬김, 성령의 열매는 모두 영생의 표지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서의 삶은 이 땅에서의 가치관과 목적을 전적으로 뒤바꾸며, 죄를 향한 감각은 민감해지고, 거룩함을 향한 갈망은 더욱 깊어집니다.

마지막 날, 믿는 자를 위한 부활의 확정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가장 강력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세로 믿는 자를 부활시키시겠다는 주권적 약속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날’은 헬라어 ‘테 에스카테 헤메라(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로 표현되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역사의 종말, 즉 구속의 완성이 드러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단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와 완전한 회복의 시작입니다.

‘다시 살리리라’는 동사 ‘아나스타소(ἀναστήσω)’는 단순한 의학적 소생이나 일시적 회복이 아닌, 완전하고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활의 몸으로 영화롭게 되는 변화이며,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바뀌는 사건입니다(고전 15:42-44).

예수님은 단지 부활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을 실현하신 첫 열매이십니다. 그의 부활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학적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말하며,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무너진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며, 이는 믿는 자의 부활을 보증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단지 이 땅에서의 번영이나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단지 존재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과 충만한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는 단지 위로가 아니라 현실이며, 모든 신자는 이 부활을 향해 오늘을 살아가는 순례자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6장 40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선언하신 복음의 정수이며, 하나님의 뜻, 영생, 부활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세워진 믿음의 진리입니다. 아들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며,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단지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구속사의 중심에 서 있는 실재하는 진리이며, 성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부활 주일은 과거를 기념하는 절기가 아니라, 오늘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고백하고, 장차 주어질 부활의 소망을 붙드는 날입니다. 우리 안에 시작된 영생은 마지막 날의 부활로 완성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약속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날마다 이 믿음 안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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